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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50·251號
발행연도
2006.9
수록면
187 - 212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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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山圖는 李滉(號: 退溪, 1501-1570)을 배향한 陶山書院과 그 일대를 그린 그림이다. 陶山은 이황이 60세 이후에 머문 은거지로 그의 학문과 생활을 집약하고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 이황 사후에 그 門人들은 이황이 은거하던 서당 뒤로 도산서원을 지어 그의 학통을 이어갔다. 이리하여 도산은 이황 개인의 은거지일 뿐 아니라 退溪學派의 본산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도산도는 도산의 이와 같은 의미로 미루어 볼 때 기본적으로 이황에 대한 존숭의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러나 도산도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도산도는 제작자의 신분과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소 다른 의도를 가지고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산도는 1566년 明宗(1534-1567)의 명에 의해 처음 제작되었다. 이것이 하나의 선례가 되어 17세기부터는 이황의 門人을 중심으로 일반 사대부들도 도산도를 그렸다. 18세기 이후에는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문인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他門下의 사람들도 도산도를 그렸는데, 이들의 제작 의도는 서로 차이가 있다. 이황의 문인들은 이황을 추념하고 그 학통을 계승하는 목적으로 도산도를 그린 데 반해, 타문하의 문인들은 도산서원을 명소로 인식하고 유람하였으며, 그 유람의 결과로 도산서원을 그렸다.
도산도는 기록상으로 17세기부터 유행하였다고 전하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10점에 불과하다. 그중 最古의 도산도는 1700년경에 제작된 연세대학교 소장 〈李文純公陶山圖〉이다. 〈이문순공도산도〉는 도산서원과 그 주변을 파노라마로 조망하고 이황의 시제를 참조하여 주변 景物에 명칭을 기입하였다. 이와 같은 구도와 記名 양상은 하나의 典形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도산도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편 조선 중기의 도산도 중에는 횡권 형식의 〈이문순공도산도〉와 달리 축 형식의 〈도산도〉가 전해져, 전범과 다른 형식의 도산도도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 중기 이 두 점의도산도는 형식은 다르지만 모두 무이도와 함께 그려져 도산도의 성리학적 의미를 보다 공고히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조선 중기의 전통을 이어 후기에도 많은 양의 도산도가 그려졌다. 그러나 후기에 도산서원을 그리는 목적은 순전히 도학전통의 계승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도산서원은 이미 영남학파의 중심지이자, 유람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었다. 따라서 영남 지방을 유람하고 그린 명승첩에도 도산서원의 그림이 포함되게 된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두 경향을 “聖賢遺蹟圖 유형의 陶山圖”와 “名勝名所圖 유형의 陶山圖”로 구분하였다.
성현유적도 유형의 도산도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우선 제작자가 대부분 남인 계열의 인물들로 이들의 발문에는 이황에 대한 존숭과 계승의식이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로, 성현유적도 유형의 도산도는 도산을 조망한 파노라마의 구도 속에 이황의 시제들을 배치하였던 조선 중기의 전범을 보수적으로 계승하는 경향을 보인다. 셋째로, 성현유적도 유형의 도산도는 대부분 무이도와 함께 그려져 이황이 朱子(1130-1200)를 계승하였음을 강조한다.
조선 후기에 새로 등장한 명승명소도 유형의 도산도는 성현유적도 유형의 도산도와 대비하여 3가지 특징을 가진다. 우선, 이 유형의 도산도는 도산을 퇴계학의 본산으로 여기기보다 하나의 명승지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둘째로, 명승도 유형의 도산도는 전범의 도산도와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실경의 지형과도 차이가 있다. 이는 제작시에 오직 명소로서 도산서원을 부각시키는 데 관심이 있을 뿐, 도산 주변의 실제 지형이나 이황의 「도산잡영」 등 도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중요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셋째로 명승명소도 유형의 도산도는 다른 명소들과 함께 명승첩의 한 엽으로 전해진다.
도산도는 이처럼 성리학적 상징성의 추구와 실경의 사실적 재현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구현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산수화에서 대단히 독특한 畵題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도산도는 한 인물을 상징하는 유적이 제작자나 시대,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되었음을 볼 수 있는 사례로서 의미가 깊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이황의 은거와 도산
Ⅲ. 도산도의 제작 배경
Ⅳ. 조선 중기(1550-1700)의 도산도
Ⅴ. 조선 후기 및 말기(1700-1910)의 도산도
Ⅵ. 결론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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