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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민속학회 한국민속학 韓國民俗學 第72輯
발행연도
2020.11
수록면
231 - 265 (35page)
DOI
10.21318/TKF.2020.11.7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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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건국 이후 첫 국행수륙재는 1395년(태조 4)의 일이다. 당시 관음굴, 견암사, 삼화사에서 설행한 국행수륙재는 왕조개창에 따른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사회적 안정을 이루기 위한 불교행사였다. 특히 삼화사 수륙재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 삼부자 살해에 따른 민심이반을 차단하고 신왕조에 대한 위협적 요소를 사전에 방지한다는 정치적 의도를 갖는 것이었다.
삼화사 국행수륙재는 1395년 춘추로 설행된 지 6년 만인 1401년(태종 1)에 강릉의 오대산 상원사로 옮겼다. 공양왕 삼부자의 죽음이 가져올 고려 유민들의 저항과 역모의 불씨가 삼척에서 되살아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 같은 우려는 1416년(태종 16) 삼척에 있던 공양왕 무덤을 고양으로 옮기는 조치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을 예우했다는 유교적 명분론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은 삼화사 국행수륙재와 공양왕 무덤을 삼척에서 모두 다 옮기고 난 뒤에야 고려 유민들에 의한 역모나 반란의 불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공양왕에 대한 신병 처리, 즉 유배와 교살, 죽음 이후 무덤과 수륙재의 설행은 조선 건국 세력들에게는 결코 떨칠 수 없는 불안이자 근심거리였다. 1401년(태종 1) 삼화사 국행수륙재의 상원사 이전을 왕조교체라는 격변기 속에서 집권체제의 안정을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정치적 산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접속하며
Ⅱ. 수륙재의 의미와 기원
Ⅲ. 삼화사 국행수륙재의 설행과 변천
Ⅳ. 삼화사 국행수륙재의 내용과 실제
Ⅴ. 삼화사 국행수륙재의 정치적 의미
Ⅵ. 나가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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