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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윤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서울민속학회 서울민속학 서울민속학 제6호
발행연도
2019.12
수록면
29 - 66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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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가의례는 왕권의 상징이자 국가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는데, 그 중 흉례는 생(生)과 사(死)라는 자연적 순환이 극명히 드러나는 예(禮)였다. 생전에 왕을 모시는 시위관이 있듯이 빈전을 떠난 왕의 혼백은 방상시의 선도를 받아 능소에 이르렀다. 방상시는 광(壙) 네 모퉁이를 찔러 사특한 것을 없앴는데, 흉례에 다양한 벽사기물이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벽사의식에 직접 참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주례』 「하관사마」에 방상시의 업무는 시난(詩難)과 대상(大喪)으로 기록되어있다. 나례(儺禮)가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에 이루어지고, 상(喪)이 죽음이라는 인간 생명의 전환기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순환성·축귀성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특히 대상(大喪)에서는 유교의 이상적 죽음관에 기인하여 혼백이 묘소에 다다를 수 있게 호종하고, 매장 시 광 속의 역귀를 물리쳐 혼백이 온전하게 분리되기를 돕기 때문에 “혼백의 수호신”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국장도감의궤를 보면 방상시는 흥인지문과 숭례문 2개 노선을 따라 이동하였는데, 행렬상 혼여와 대여의 사이이며 부장품의 좌우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축귀의 성격이 부각된다. 이를 담당한 사람들은 ‘방상시재인’, ‘방상시인부’로 불리며 저전상인과 신분이 낮은 사람을 채용하였다. 방상시 관리감독은 경기감영과 갑오개혁 이후 경무청에서 이루어지고, 제작자인 방상시장은 군기시 어영청에 소속되었다. 이를 통해 중국 주나라부터 군사기관에서 흉례업무를 관장했고, 조선 말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을 알 수 있다.
국장도감의궤 발인반차도의 방상시는 시대별로 변화되고 조선식으로 변모된 양식이 나타난다. ①가면의 눈은 4개 · 2개가 혼합되었지만 1834년 이후 4개로 확립된다. 붉은색 얼굴에 황금 귀걸이가 특징이며, 두건을 써서 머리카락을 가렸다. ②복식은 상복(喪服)과 같은 삼베 소재이며, 현의주상 · 웅피 · 행전 · 버선 · 전대까지 지급하였다. 반차도 중 예서에 기록된 현의주상이 지켜진 경우는 단 2건이다. ③무기는 창과 방패 각 2개가 쌍을 지어 나타나며, 19세기 거행된 11건의 발인행렬에는 창만 사용된다. 창날의 수와 방패의 형태 등은 변화되며, 방패와 방망이가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④탈 것은 초기에 말을 이용하고, 1627년 이후 2가지 유형의 수레가 사용되었다. ⑤수레를 끄는 ‘견예인’은 백색복장이며, 장거리 이동과 노동 강도로 인해 보충인원까지 최대 80여명을 뽑았다. 각 수레마다 1·2·4·6명까지 투입되었고 밧줄을 이용해서 수레를 끌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방상시의 원형과 혼백의 수호신적 역할 정립
3. 조선시대 방상시의 성립과 운용
4. 『국장도감의궤』 반차도에 나타난 방상시의 시기별 변화 양상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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