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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명래 (소영문화연구소)
저널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구 정신문화연구) 한국학 2020 가을호 제43권 제3호 (통권 제160호)
발행연도
2020.9
수록면
469 - 501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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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정(永保亭)은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충청수영성에 소재하는 정자이며, 읍취헌 박은(揖翠軒 朴誾)은 조선최고 시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로써 1503년에 「영후정자(營後亭子)」 5수를 이 영보정에서 지었다.
이 시는 읍취헌의 대표작으로써 이후 사백년 동안 영보정 제영시의 전범으로 존숭되었으며, 이 시의 유명세에 따라 영보정은 전국적인 명정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충청수영은 천하의 명승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영보정과 「영후정자」 시는 불가분의 관계로써 당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목대상이지만 그 시제(詩題)가 왜 그렇게 작정(酌定)되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아니하였다.
이에 따라 박은은 어찌하여 「영후정자」 시가 어떤 정자의 제영시(題詠詩)임에도 그 정자를 당당하게 내세우지 못하고, 실체가 아닌 허상(虛像)을 내세워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와 당시에 정치적 요인에 대하여 밝혀보고자 한다.
조선 시대 사회에서 사화(士禍)나 정쟁의 옥사(獄事)에서의 멸문(滅門)과 참혹한 극형 집행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극대화시켜 주어 생각만 해도 치를떨게 하였고, 사화(史禍)의 사례는 문인들에게 있어 글을 쓸 때에는 신중하게 앞뒤로 재보고 또 생각해 본 후에 붓을 잡도록 생활화되어 있었다고 본다.
왜 「영후정자(營後亭子)」라고 시제를 붙였을까 라는 과제는 ‘영보정은 1504년 이량(李良)이 처음 지은 것이 아니라, 1468년 강순(康純)이 창건했다’는 김명래(2019)의 영보정 강순 창건에 관한 주장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박은은 「영후정자」를 지을 때 영보정이 36년 전에 강순이 창건했던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박은 이후에 영보정 제영시를 지은 문인들도 이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그 시대의 불문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순은 남이(南怡)의 옥사에 연류 되어 사형당한 대역죄인인데, 그가 창건한 영보정을 시의 제목으로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문인들은 박은의 시에 관련된 연구나 영보정에 관련된 연구에서, 「영후정자」라는 시제가 왜 그래야 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겠지만, 그인과 관계를 파악하고 그 원인을 추적하지는 아니하였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박은의 「영후정자」 시제에 대한 고찰
Ⅲ. 「영후정자」와 관련된 영보정 창건내력 검토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s

참고문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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