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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학회 포은학연구 포은학연구 제24권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47 - 17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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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개성의 포은 정몽주 사적에 대한 쟁점과 실태를 다룬 것이다. 2013년도 세계유산에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에 포은 정몽주와 직접 관련된 성균관·숭양서원·선죽교·표충비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조선 태종의 즉위와 함께 포은을 역신에서 충신으로 재평가한 시각은 세종대로 이어졌다. 포은은 길재와 함께 고려왕조에서 절의를 지킨 인물로 재평가 되고, 『고려사』 「열전」에 수록되었다. 『삼강행실도』 「충신」편에 도형과 찬(贊)을 수록하였다. 『포은집』 초간본이 간행된 시기도 세종 때이다. <용비어천가>에는 「포은선생사략」을 상세하게 부록하였다. 조선 시대에 기록된 포은의 사적은 전적으로 세종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세종대 이전의 기록은 야사로 취급되거나 위작으로 간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포은을 숭배화하기 위하여 조선후기의 문인들이 <단심가>와 선죽교를 위작하였다고 주장하는 일부 연구자들의 단서가 바로 세종대의 기록들이다. 세종대의 포은에 대한 기록은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려는 역사관에서 재구성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특히 태종~세종대에 편찬된 실록과 <용비어천가> 기사는 태종 이방원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면서 맥락이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세종대의 문헌기록만으로 포은의 사적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는 것은 무리이다. 조선시대의 많은 문인들이 개성의 표충비·숭양서원·선죽교를 탐방하며 시문을 지어 포은의 충절을 기렸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우국충정을 담아내는 매체로 선죽교를 부각하였다. 개성의 포은 유적으로 성균관, 선죽교, 표충비, 숭양서원이 있다. 성균관은 포은 학문의 산실이다. 포은 성균관에 입사한 이후 성균관 박사에서 대사성까지 오른 인물이다. 포은의 주요 활동은 거의 모두 성균관에서 이루어졌다. 선죽교는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 동쪽에 있다. 포은이 순절한 곳으로 포은과 개성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선죽교 주변에는 여러 기의 석비가 있다. 표충비각은 영조와 고종의 어제어필 선죽교시비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최근 영조 당시에 작성된 원본에 준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는 자료가 발견되어 주목되었다. 숭양서원은 포은의 옛 집터에 건립된 서원이다. 개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개성의 포은 유적은 현재에도 우리나라 유학(儒學)의 요람, 충절의 표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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