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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전병구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
저널정보
원광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제20집 제3호(통권 제36호)
발행연도
2019.12
수록면
77 - 10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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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하여 개항 이후 전국에서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익산은 전라도 북단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일찍부터 천주교 신자와 ‘공소’가 많았다. 한국천주교 초기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은 다양한 신앙 서적을 한글 번역하여 한글은 천주교의 공용어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신자들이 쉽게 교리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고자 하였는데, 그 방법으로 ‘공소학교’를 운영하였다. 익산에서도 1894년에 여산 ‘시오목’ 공소학교를 시작으로 1895년 나바위 공소학교가 등장하였다. 1899년에는 여산 ‘시오목’ 외에 용안 ‘함박재’와 ‘돈다뫼’, 함열 ‘두락이’와 ‘댁말’ 등 5개 공소학교에 13명의 학생이 있었다. 1900년에는 함열 ‘장구재’, 익산 ‘오산리’ ‘노적리’ ‘피뫼’가 추가되어 7개 공소학교에 학생 18명으로 전라도에서 가장 많았다.
공소학교는 연속적으로 운영되지도 못하였고 경제 상황도 매우 열악하였다. 학생 수도 적었고 학교의 유지 여부도 교사나 학생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개신교 학교가 도회지에서 대규모로 운영되고 중등, 고등교육까지 성장한 것과는 달리 천주교 공소학교는 산골의 소규모 서당과 비슷했다. 개신교 학교의 상당수가 오늘날까지 맥을 이어온 것과는 달리 공소학교는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소학교는 개신교 학교나 공립학교보다 이른 시기에 교육의 혜택이 미치지 않던 산골에서 근대교육을 하였다. 또 개신교 학교와는 달리 한글을 교육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공소학교 중에는 통감부 시기에 나바위성당 계명학교처럼 보통학교 인가를 받기도 하였다. 1895년 공소학교로 출발한 계명학교는 1908년 베르모렐 신부에 의해 보통학교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교육령을 따르지 못해 비인가학교의 처지였으나 꾸준히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1924년 강경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나바위성당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퇴학을 당하면서 본당신부와 강경공보 교장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더니 1926년 계명학교가 돌연 폐교하고 말았다. 3년 후인 1929년 이약슬 신부에 의해 복교되었고 1933년에는 교사 4명에 4학급 125명의 학생이 다니는 큰 학교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계명학교는 4년제 비인가 학교로 계명학원이라고 하였다. 계명학교는 1936년에 직원이 5명이고 학생이 225명까지 늘었지만 1944년 망성국민학교 분교가 되었다. 해방 후 학교를 되찾았으나 1947년 폐교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나바위 계명학교는 일제강점 말기 전라북도 천주교 학교 중 전동성당 해성심상소학교 다음으로 큰 학교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익산 지역 천주교 공소학교
3. 나바위성당 계명학교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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