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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용철 (경희대학교)
저널정보
춘원연구학회 춘원연구학보 춘원연구학보 제16호
발행연도
2019.12
수록면
207 - 231 (25page)
DOI
10.31809/crj.2019.12.1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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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명이 이학수인 운허(耘虛, 1892-1980) 스님은 애국인이고, 불교인이며 아울러 대장경 번역자이고, 교육인이었다. 그는 만주에서 10여 년 간 독립운동 후, 30세 이후 불교에 귀의하고,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였다.
필자는 운허 스님의 많은 업적 중, 본론에서 다만 항일 애국 활동만을 고찰하려고 한다. 그래서 본론의 주제를 독립운동시기의 이름을 이시열로 썼다. 이학수는 문인 이광수 보다 고향에서 24일 늦게 출생했다. 두 소년은 함께 한문도 배웠으며 같은 집에서 살기도 하는 등 자주 만났다.
이학수는 17세까지 집에서 한문을 배우고 결혼하였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후에야 평양의 대성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었다. 이때 이광수는 이미 일본에 유학 후 고향의 오산학교 교사로 취임했다. 이학수는 독립 운동시기 그의 이름을 이시열로 바꾸고 동창학교 등의 교사로 민족교육을 계속하다가 1919년 국내의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위해 한국에 몰래 입국했다.
그는 일본 경찰을 피해 강원도의 절에 숨었다가 스님이 되어 이름을 다시 박용하로 바꾸고, 금강산 유점사를 거쳐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에서 월초 스님 밑에서 치열하게 수행했다. 그는 스님으로도 항상 구국의 길을 잃지 않아 도중 다시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는 춘원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떠나 독립운동의 방법을 바꾼 것과 시기적으로 매우 비슷하였다.
한국전쟁 중 그의 외아들 우근은 북한으로 갔고, 부인은 세상을 떠났으며, 딸과 사위는 행방불명이 됐다. 그리고 다음해 초에 그가 머물던 봉선사와 광동중학교도 폭격으로 불타버렸다. 그는 한꺼번에 몸만 빼곤 모두 잃었다. 그러한 아주 어려운 순간에도 그는, “아직 건강하니 여생을 가꾸리라”고 다짐했다.
1946년 9월부터 연말까지 봉선사에서 춘원과 이학수는 교장과 교사로 어릴 때처럼 한 지붕 아래서 한 솥 밥을 먹었다. 이 기간을 포함한 4년 반 동안 운허 와 춘원은 불과 30리 거리의 광릉 봉선사와 사릉에서 살았다. 오늘날 불교의 한글화로 대중화를 이끈 운허 스님의 추모비와 한국 근대문학사의 개조인 춘원의 문학비는 함께 출발하여 아주 다르게 살았던 두 위인의 모습으로 봉선사 앞에 나란히 서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2. 소년시기 이학수의 전통교육
3. 남만주의 독립투사 이시열(1911-1920)
4. 박용하 (뒤의 운허)의 애국운동 (1929-1932)
5. 해방 후, 운허 스님과 춘원의 교육과 애국활동(1945-1980)
6.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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