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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34권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39 - 84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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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泗沘時代의 정치사는 管山城 패전을 겪으면서 왕권이 동요한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이것은 『三國遺事』 武王條를 중요한 사료로 받아들이면서 무왕이 정상적인 왕위 계승을 하지 못하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왕조는 기본적으로 彌勒寺 창건에 대한 연기설화라고 보아야 한다.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한 사실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新羅의 영향을 강조하는 내용들이 덧붙여지면서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무왕은 역시 『三國史記』의 기록처럼 法王의 아들로서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법왕의 아버지이자 威德王의 아우인 季(惠王)의 존재가 주목되는 것이다. 백제는 관산성에서 패전을 겪었지만, 扶餘 陵山里 寺址의 「昌王銘石造舍利龕」銘文을 통하여 위덕왕대 왕권이 聖王系 왕족을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면에는 위덕왕의 同氣들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계는 성왕계 왕족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계는 관산성 패전 직후인 위덕왕 2년(555)에 청병사 자격으로 倭에 파견되었다. 비록 대규모 청병에는 실패하였지만, 왜에 머물면서 정권의 유력 씨족인 蘇我氏 세력과 사적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또한 이듬해에 호위 성격의 군사집단과 귀국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외교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이후에 백제와 왜의 교섭이 20여 년간 공백기를 맞이하였지만, 한반도 정세의 변화로 위덕왕 22년(575)에 對倭 교섭이 재개되었다. 여전히 백제에게 대왜 교섭은 중요하였으며, 계의 역할과 영향력도 점차 증대되었을 것이다. 扶餘 王興寺址에서 출토된 「靑銅製舍利盒」명문은 위덕왕 24년(577)에 왕자가 사망한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사찰 건립과 사리봉안의식을 주도적으로 행하였다. 이는 죽은 왕자가 위덕왕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위덕왕은 유일한 아들이 사망하자, 성왕계 왕족의 핵심이며 자신의 왕권을 뒷받침해왔던 계를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위덕왕대에 이루어진 왕제 계의 역할과 그의 왕위 계승은 백제말기를 새로운 왕계로 이끌게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축적된 힘은 훗날 무왕과 義慈王代 왕권강화의 토대로 작용하였으며, 더 나아가 백제가 다시 한 번 중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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