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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史叢(사총) 제96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45 - 7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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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사건은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산군에 살던 윤지충과 권상연 이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윤지충은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장례는 성심을 다해 치렀지만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 역시 지내지 않았다. 이는 충・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 으로 삼았던 유교사회 조선에 큰 충격이었고,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이 죽임을 당하였던 사건으로 신해박해라고도 한다. 진산사건은 이러한 전 례 문제에 대한 충돌과 함께 남인에 대한 정치적 견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진산사건은 그 사건 자체가 충격이기도 하였으나, 이후 조선에 서 천주교를 아버지와 임금도 없고, 패륜으로 강상을 어지럽힌 사학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른 박해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사건 이다. 정조는 사건의 주도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에게는 엄한 형벌로서 처분하였지만, 진산사건 자체는 그 파장을 최소화하려고 하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즉위하여 즉위 초부터 궁극적으로 사친을 추왕하기 위한 행보를 하나하나 완성해 갔으며, 이는 정조의 사무치는 효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조가 진산사건을 비교적 온건하게 처 분하였고, 정학을 바로 세운다는 온건한 천주교 인식을 보여준 것은 그 의 본심으로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효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정조였기에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운 이 사건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 그의 진심 일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냉정하게 사건을 처리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정치가들이 이 사건으로 남인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채제공이 사건과 관계는 없다고 할지라도,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과는 관련이 있었다. 그 렇지만 채제공은 영조대부터 사도세자를 보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만큼 정조는 그를 등용하여 측근 신하로서 정조의 정책과 효를 실현하는 결정들을 입안하고 추진하는데 앞장서게 하였다. 정조가 채제공을 정승 에 임명함으로써 남인에게까지 탕평을 확대하였다는 정치적 성과를 자랑 할 수 있지만, 이는 사도세자의 무함함을 공식화하고, 그에 맞는 존숭을 시행하며, 추왕을 완성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므로 정조는 효의 완성 을 위해 진산사건의 파장을 최소화 하려고 하였으며, 천주교 문제에 온 건적인 인식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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