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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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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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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국립민속박물관 민속학연구 민속학연구 제44호
발행연도
2019.6
수록면
219 - 246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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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급속도로 변한 도정도구 변화를 단순한 기술발전이 아니라 쌀의 상품화와 그에 따른 농업·농촌의 문화 변동이라고 여기고 이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19세기 말 시작된 연료 이용 정미 도입과 식민지시기를 전후로 보급되는 과정 그리고 이에 대한 반작용(reaction)이라 할 수 있는 1920~1930년대 무연료 정미기 발명과 발명가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식민지시기 출간된 조선미(朝鮮米)와 정미기에 대한 연구서, 특허문서 및 통계자료 및 신문 기사 등을 1차 사료로 삼아 분석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연료 이용 정미기 도입과 보급은 기술 발전에 따른 ‘근대화’ 과정이 아니라 조선미(朝鮮米)가 1890년을 기점으로 일본을 소비시장으로 하는 상품화 과정 속에서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산미증식계획을 바탕으로 하는 생산량 증가와 이출량 증가 및 미곡검사제도는 연료 이용 정미기 보급을 더욱 추동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1920~1930년 식민지 조선의 농촌사회와 농가, 특히 영세농가들은 연료 이용 정미기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1920년대 전반기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농정과 농업의 일본 시장 종속화로 인하여 양극화를 격심하게 겪었고 1920년대 후반부터 세계대공황으로 촉발된 농업공황을 거치면서 하위에 속하는 많은 농가가 몰락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비와 운용에 많은 자본이 필요한 연료 이용 정미기는 식민지 조선의 농촌사회와 농가에 부담이었다.
무연료 정미기 발명가들은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연료 이용 정미기의 대안으로 무연료 정미기를 발명했다. 발명가들은 연료 이용 정미기보다 초기비용이 저렴하고 석유가 아닌 인력, 축력, 수력 등을 동력원으로 운용하며 더 나아가 재래 도정도구보다 뛰어난 생산성을 가질 수 있는 무연료 정미기를 발명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무연료 정미기는 식민지 조선에 폭 넓게 보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20~1930년대 무연료 정미기 발명은 식민지 조선의 발명가라는 새로운 행위자들이 연료 이용 정미기 보급이라는 ‘근대화’에 대해 자본과 제국 일본의 시선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 농촌사회와 농가의 시선에서 바라본 비판적 고찰을 현실화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목차

1. 서론
2. 연료 이용 정미기의 도입과 확산
3. 무연료 정미기 발명과 사회적 의미
4. 결론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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