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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일환 (서울장신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1호
발행연도
2019.9
수록면
5 - 40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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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동교회는 곤당골교회 교인들 사이의 신분적인 갈등으로 인해 1895년 5월 이후에 홍문동 지역에서 양반교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교회다. 그 후 1897년 12월에는 정식으로 교회당을 마련하고 1898년 10월에는 미국 북장로교 서울 선교지부의 관할을 받는 교회가 되었으며, 제직회를 구성하는 등 당시 서울내의 중요한 장로교회 중 하나로 발전했다. 그리고 1899년 초 곤당골교회와 재결합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말부터 한국인들만의 독립교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에 대해 1902년 2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공의회 산하 서울공의회위원회는 17명의 교인들을 출교(黜敎)하는 징계 결정을 했다. 징계 결정의 중요한 요인으로 선교사들의 관할로부터 벗어나서 독립교회를 세우려고 한 것과 교회당 구입과 관련한 자금 문제에 대한 선교사들의 의구심 등이었다.
이 징계 결정으로 홍문동교회는 분열되어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교인들은 제중원에서 모였고, 출교당한 사람들은 기존의 교회당에서 모였다. 그러나 징계를 받은 교인들이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다시 합류하기를 원했고 선교사들은 이들을 받아줌으로써 징계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이후로 교회명칭을 홍문동교회 대신 제중원이 있는 지역 이름을 따라 구리개, 동현(銅峴)예배당이나 중앙교회 등으로 사용했지만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홍문동교회가 완전히 해산되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또한 징계를 받았던 교인들 중에는 박중근․정윤수․유흥열 등과 같이 오래지 않아 복권되어서 몇 년 후에는 조사․장로 등으로 활동하면서 교회에 공헌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홍문동교회의 분립과 재결합
Ⅲ. 1902년 징계사건의 결말
Ⅳ.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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