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미란 (부경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95호
발행연도
2019.9
수록면
207 - 246 (40page)
DOI
10.37331/JKAH.2019.09.95.207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필자는 지난 연구에서 대구무술오작비를 검토하여,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 인민의 노동력을 功이라는 이름으로 計數化하여 공역행정의 도구로 사용하였고, 신라의 오작비도 이러한 공역행정이 작동했음을 논증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본 연구는 798년에 건립된 영천청제비 정원명에서의 ‘法功夫’도 기존에는 法幢군인의 勞役이라고 이해해왔으나, 동시대 중국과 일본의 역역제도의 변화를 검토하여 신라 국가적 공역에 동원되어 대가를 받는 고역부임을 고찰하였다.
그 근거로는 첫째, 동아시아에 사회문화적인 영향을 많이 끼친 고대 중국에서는 인민의 노동량을 계수화하고[計功] 이를 현실가치[庸, 雇價, 功直 등]와 연결시킨 법제적 환경이 있었다. 그리고 국가적 공역이나 역제는 초기에는 無償의 役이 원칙이었지만, 8세기 이후 당에서는 노동량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는 有償의 役 즉 雇役으로 변화하였다.
둘째, 이러한 경향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7세기 중반에 중앙정부가 주도한 국가적 공역에서는 동원된 역부에게 노동량[功]에 따라 식비를 주었으므로 功夫라고 하였다. 당의 율령을 직접 받아들인 직후 일본의 역역제도도 無償의 役을 전제하였지만, 8세기 중반 이후 국가적 공역에는 당과 마찬가지로 노동량[功]에 따라 식료[功食]나 임금[雇直, 功料, 功直]을 받는 고역 및 화고로 운용되었고, 고역부를 某功夫라고 부르기도 했다.
셋째, 8세기 후반의 사회불안과 재해를 극복하기 위해 당에서 유용을 위한 귀농정책을 실시했듯이, 동시대인 원성왕대에도 국가적 사업을 통해 인민의 유랑을 막고 세수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당시 영천청제비의 수축이 왕실직할지에서 원성왕계 왕실이 주도한 사회안정책으로 시행된 국가적 고용노동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왕실직할지였던 청제의 몽유지에서 다른 재원이 아닌 원성왕의 왕실이 주도하는 국가적 공역이기 때문에 功夫 즉 고역부에 ‘法’을 관칭한 것으로 보았다. 집사부의 전대등은 청제 수축을 위한 역부 징발뿐 아니라 역부에게 드는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로 비문에 등장하고 있다.

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
II. 영천청제비 정원명을 둘러싼 몇 가지 논점
III. 8세기 후반 동아시아 役制의 변화와 고용노동
IV. 영천청제비 정원명에서 보이는 法功夫
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8)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9-911-00125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