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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32호
발행연도
2009.1
수록면
75 - 102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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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자기(瓷器)는 백자(白瓷)이다. 그러나 그러한 백자가 조선의 대표적인 자기문화로 자리매김한 정확한 시점이나 배경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조선왕실과 일부 사대부들은 경기도 광주에 왕실전용의 가마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이미 백자를 사용했다. 고려후기부터 시작된 상감청자의 질적 하락으로 인하여 조선초에 만들어지던 상감청자들은 그 문양이나 유태(釉胎)의 상황이 더욱 조잡해졌다. 대부분 분청자들이 공납되던 15세기 전반에도 일부 백자들이 함께 국가로 유입되었다. 경기도 광주에 왕실 전용의 가마가 만들어지기 전에 제작된 백자들의 특징들에 대한 접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생산지역과 관련된 일부 문헌기록들과 분청자에 붙어서 발견되는 백자편들에 의해 그 면모가 부분적으로 확인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헌자료들에 의해 피상적이나마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던 공납백자의 특징은 최근 조사된 <백자‘공안부’명접시편>에 의하여 보다 분명해졌다. <백자‘공안부’명접시편>은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의 가마터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언급된 장평자기소가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포함된다. 유물은 비교적 치밀한 백회색 태토로 제작되었으며 약간 청색이 감도는 투명유가 시유되었다. 굽 외곽에 공안부 세 글자가 각각 한 자씩 인각되었다. 이 유물은 15세기 전반인 1400년부터 20년간 운영되었던 공안부를 위하여 제작되었다. 『태종실록』의 기록을 존중하자면 이 유물이 만들어졌을 시기는 1417년에서 1420년까지로 더욱 줄어든다. 조선이 명의 영향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우수한 경질백자를 생산해 내기 이전에도 <백자‘공안부’명접시편>과 같은 공납백자들은 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백자 전용인 양구의 가마에서는 공납백자라고 해서 양질의 자기를 확보하기 위한 별도의 장치나 노력이 확인되지 않는다. 과학적인 분석방법을 통해 확인한 결과 사용된 유약은 고려백자와 그 성분이 일치하였다. 여말선초 중국의 자기문화가 백자 중심으로 변화된 상황으로 인한 외부적인 자극과 양구의 백자 생산과는 유기적인 상관관계가 확인되지 않는다. 비록 그릇의 최종 수요처가 왕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자‘공안부’명접시편>의 조형적인 특징이나 원료의 활용에 있어서 여말선초에 제작된 일반적인 자기 그릇들과 비교하여 특별히 새로운 시도들이 적용되었던 정황은 확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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