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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중앙문화재연구원 중앙고고연구 중앙고고연구 제20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 - 23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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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대평리유적은 금강 남안의 자연제방에 입지한 유적으로 A~D의 4개 지점으로 나뉘어 총 3개 기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전기와 원삼국~백제시대에 해당하는 유구가 집중 분포하며 통일신라 이후의 유구는 많지 않은 편이다. 유적의 구조를 보면, 청동기시대 전기는 주거지, 수혈유구, 경작지(논)로 구성되어 있고, 원삼국~백제시기는 수혈주거지, 굴립주건물지, 수혈유구(저장시설 포함), 구상유구, 도로, 무덤, 경작지(논, 밭)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고 있어 대규모 취락의 구성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대평리유적 일대의 고지형분석 결과 유적 주변은 크게 2열의 자연제방이 형성되고 동시에 2개의 단구가 형성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단구와 자연제방의 형성은 범지구적인 기후환경변동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어떤 시기의 유적이 존재할 수 있는지 예측 가능하며, 따라서 유적환경도 이러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지형을 선택한 집단들의 토지이용방식도 전체적인 유적환경을 해석함으로써 추정할 수 있다. 즉 초기농경집단인 각목돌대문토기집단의 취락은 구하도의 습지상 토지를 수전으로 이용하기 위해 정착하였으며, 그들의 토지이용방식은 관개수로가 불필요한 습지지형을 선택하여 천수답 형태의 수전을 조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뒤에 자연제방의 토양이 구하도로 흘러들어가면서 습지상태의 유지가 더 이상 불가능하고, 또한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한랭화에 의해 벼농사가 어려워지자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오랜 기간 충적지는 공백기로 남아 있다가 기원전 2세기 전후의 범지구적 온난화에 의한 범람이 끝나고 어느 정도 안정화된 3세기 이후 재점유가 시작된다. 이때의 재점유 기간은 3세기에서 5세기대로 원삼국~백제기에 해당되는데, 자연제방에는 취락과 분묘 등의 시설물이 배치된다. 그리고 구하도는 범람에 의해 사질과 실트질이 퇴적되어 더 이상 습지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환경으로 변화하면서 논농사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밭으로 경작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5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다시 유적이 소멸하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에 다시 시작된 소한랭화 현상 때문일 가능성도 있지만 나성리유적으로 대표되는 백제 지방도시의 몰락과 같은 대외 혹은 대내적 정치적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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