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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58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251 - 277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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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광개토태왕릉비문 속의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는 비에 관한 여러 연구분야 가운데 가장 주목받았던곳이다. 신묘년조 기사란 비문 1면의 제8행 34자부터 9행 24자까지를 말한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이 기사는 비문 1775자 가운데 32자에 불과하지만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당시 동북아 각국의 역사적 위상이 달라질 수 있다. 광개토태왕릉비는 장수왕이 414년에 先王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이 비가 다시 우리 눈앞에나타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비 발견 이후, 비는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과 탁본을 만들기 위해 비면에 바른석회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 버렸다. 따라서 원래의 글자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은 석회를바르기 이전에 만들어진 탁본들이다. 신묘년조 기사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글자는 1면 9번째 줄 13번째 글자이다. 이 글자에 대하여 기존에는대개 ‘海’로 읽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석회를 바르기 이전의 여러 탁본 자료를 비교 검토한 후, 이 글자는‘海’로 읽을 수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를 ‘沺’字로 읽었다. ‘沺’의 뜻은 ‘넓은 강’의 의미이다. 이는 비문의 또다른 곳에서는 ‘阿利水’로 표현하였으며 오늘날의 漢江이다. 이를 감안하여 신묘년조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百殘(백제)과 新羅는 오래전부터 (우리 고구려의) 屬民이었다. 그래서 朝貢을 바쳐왔다. 그런데 倭가 辛卯年에 (우리 속민의 땅에 침범해)오므로, (광개토태왕이) 沺을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하여 臣民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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