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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24호
발행연도
2007.1
수록면
329 - 361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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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9세기 말 진주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盧應奎라는 인물에 대한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노응규는 명망있는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와 노응규의 조상은 가세가 몰락하여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의 부친인 盧以善이 安義로 거주지를 옮겼던 것도 생계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응규는 학문에 전념하여 崔益鉉, 宋秉璿 등 당시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하던 노론계 유명 인물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많은 노론계 인물과 교유하게 된다. 1895년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노응규는 1896년 1월 초에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진주와 인근 고을의 여러 세력들의 호응에 따라 한때 노응규는 鄭漢鎔과 함께 경남 서부지역 일대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미쳤다. 그들은 의령에서 관군과 전투하여 물리치고 부산을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다. 그러나 3월 초 진주성은 관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후 노응규는 오랫동안 여기저기로 피해 다니다가 1897년 10월 초 왕으로부터 그의 활동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여러 관료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부형 살해에 대한 복수도 할 수 있었다. 이후 노응규는 귀향하여 생활하기도 하고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11월 중순에 그는 충청도 黃澗으로 들어가 세력을 규합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핵심 인물들이 순검에 체포되면서 이 일은 무산되었고,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다가 병사하였다. 노응규의 의병활동은 19세기 말 당시 지방 유림 사이에 퍼져 있던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실천에 옮기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는 당시 노론계의 사상과 노응규 집안의 가풍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학문 수행과정에서의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이 그의 사상과 현실대응에 더 치열한 면모를 보이게 하지 않았나 추측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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