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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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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포은학회 포은학연구 포은학연구 제7권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123 - 157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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圃隱 후손의 경남 서부지역 정착은 그의 장손인 鄭保가 세조 때 단성현에서 유배생활을 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중 정보의 증손인 林軒 鄭世弼의 후손, 즉 임헌공파가 단성ㆍ합천ㆍ진주에 세거하게 된다. 정보의 단성 유배를 전후해서 그의 종질인 道菴 鄭智忠이 진주에 들어와 정착한다. 그의 후손은 도암공파라 하는데, 이들중 일부는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고 일부는 하동과 진주에 세거한다. 경남 서부지역의 단성ㆍ합천ㆍ진주ㆍ하동 등지에 정착한 영일정씨는 이후 해당 고을의 명망있는 가문으로 자리잡게 된다. 경남 서부지역에 정착한 영일정씨 인물 중 남명을 사숙한 인물은 적지 않았다. 한때 來菴 鄭仁弘 문하에 들어가 있었던 鄭暄은 朴絪ㆍ河弘度 등 남명학파 내의 유명 인물과 교유하였고, 주위의 중망을 받았다. 이런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조정 관료들의 천거로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도암공파 계열에도 남명 사숙인이 있었다. 鄭頠도 일찍부터 하홍도를 종유하였고, 허목 등 유명 인물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정기나 정위의 아들 鄭欐도 하홍도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경남 서부지역 사림들은 대거 남인화해 갔지만, 그들이 모두 남인화해 갔던 것은 아니다. 『남명집』 임술본 훼판사건, 무신난 등을 거치면서 서인 가문들도 늘어갔다. 같은 가문 내에서도 남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경남 서부지역에 정착한 영일정씨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남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지만, 적지 않은 인물이 노론계 유명 인물의 문하에 들거나 종유하였다. 노론계 인물 중에는 생원ㆍ진사시에 합격한 자도 있었고,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경남 서부지역에 세거하던 영일정씨는 계파에 따라 가문의 번성과 침체의 양상이 달랐고 집거하는 지역도 달랐지만, 1820년 이들은 계파를 초월하여 진주 정수리에 선조를 모시는 세덕사를 건립하였고, 이후 이것은 옥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이외에 포은을 새롭게 기리기 위해 그의 문집을 중간하는 작업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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