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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대동문화연구 제104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43 - 70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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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는 일본의 등장으로 동아시아 사회의 정세가 복잡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1866년 병인양요를 당했던 조선은 서양 세력과 일본의 동향을 동시에 파악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서양화된 일본이 서양 세력의 지원을 받아 조선을 공격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높아져갔다. 조선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거의 전적으로 사행사를 통해 대외 정세를 확인하였다. 따라서 1870년대 사행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는데 실제 이 시기의 사행사는 전에 비해 적극적인 탐문 활동을 전개하여 여러 정보를 입수하였다. 특히 1873년과 1874년의 사행사는 청측 인사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고, 󰡔중서문견록󰡕과 같은 자료를 활용하여 보다 정확하게 당시의 정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행 활동을 통해 일본은 청도 쉽게 다루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일본과의 교섭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강화도조약의 체결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청 세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이 일본의 무력 침략을 억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한 기대를 갖게 된 것은 청・일수호조규에 ‘소속방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청・일수호조규에 대한 믿음의 바탕에는 근대적 조약체계 내지 서양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만사건 때 영국이 분쟁을 중재한 사실을 확인하면서 국제 사회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약체계에 대한 믿음은 서양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도 변화를 끼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새로운 인식을 지니고 있던 부류는 소수였기 때문에 대외 정책의 변화과정은 순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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