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대동문화연구 제72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157 - 200 (4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1939년 당시 명치좌를 운영하고 있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는 단성사의 흥행권을 인수하여 대륙극장이라 개명하고 “송죽 제2봉절과 양화를 상영”하는 “명치좌 자매관”으로 삼았다. 이로써 경성부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조선인 영화상설관 단성사는 40여 년의 역사를 마감했다. 본고는 조선인 영화상설관으로 독보적인 위상을 누려온 단성사가 1930년대 말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왜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또 그러한 공간을 근거지로 삼아서 이루어졌던 문화적 실천은 무엇이었는가를 규명하고자 한다. 1918년 영화상설관으로 개관한 이래, 조선영화의 제작, 배급, 상영의 전 영역을 아우르며 전성기를 누렸던 단성사는 1920년대 말 전문 배급사의 등장, 1930년대 초 발성영화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등장, 그리고 일제의 영화시장에 대한 전면적인 개입에 의해 견인된 1930년대 중반 이후의 흥행시장 재편이라는 상황을 맞으며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39년 단성사의 몰락은, 조선인 영화상설관이라는 종족 공간의 소멸인 동시에 영화 분야에서 조선인에 의해 이루어진 특정한 형태의 문화적 실천의 소멸이기도 했다. 조선인 극장의 몰락은 산업의 중앙집중화와 문화의 균질화가 획기적인 수준으로 진전되었던 1930년대 말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의 의미는 조선이 제국의 시장으로 완전히, 즉 인종, 언어, 문화에 의한 차이를 생산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완전히 편입되었다는 것, 그리고 의미 있는 차이를 생산해내는 실천으로서의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균질화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지방적 맥락과 제국의 호명 사이를 오가는 식민지 주민들을 균질적 ‘대중/국민’으로 구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26)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