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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함충범 (한양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22집
발행연도
2013.6
수록면
439 - 471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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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영화 유입 시기(1901)부터 중일전쟁 발발 시점(1937)까지 한반도에서 어떠한 뉴스영화가 어떻게 상영되고 제작되었으며 그 변화의 양상이 어떠하였는지, 그것이 동시기 일본 뉴스영화(계)와는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 등에 대해 주로 실증적으로 파악하였다. 구한말 한국(인)은 타자화된 대상으로서 카메라 렌즈의 피사체가 되었다. 그리고 러일전쟁-을사조약-고종 퇴위-군대 해산-사법권과 경찰권의 박탈-한일병합 등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카메라를 통한 시선의 주체가 서양(인)에서 일본(인)으로 교체되어 갔다. 1910년,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기존의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환원될 무렵, 경성을 중심으로 영화 상영이 제도화되었다. 조선인/일본인, 조선어/일본어라는 민족-언어로 경계 지어진 활동사진 상설 극장에서는 구미와 일본의 뉴스영화가 관객에게 특정사실과 세계(관)를 전시하였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대 조선 식민지 정책 기조가 소위 ‘문화 통치’로 전환되는 한편, 조선에서 (무성)영화 제작 활동 또한 활발해져 갔다. 그러면서 조선총독부를 위시한 권력 기구와 언론 기관, 그리고 단성사 등 극장을 중심으로 여러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1920년대를 통과하며 조선일보사, 동아일보사 등 조선어 민간지 발행사와 조선인 민간 조직체인 동아상공영화뉴쓰사를 통해 조선인을 주축으로 뉴스영화 제작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을 통과하며 수그러들고 말았다.

목차

요약문
1. 서론
2. 영상 필름의 뉴스 매체화와 한반도의 대상화
3. 활동사진 정착화에 따른 뉴스영화의 상영 및 조선총독부와 단성사에 의한 시사-보도 기록영화의 제작
4. 민간 언론사와 영화사의 뉴스영화 제작의 시도 및 한계, 그리고 뉴스영화의 유행 확산과 중앙 집권화
5.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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