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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46권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75 - 20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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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동성왕대의 정치변동과 왕권강화의 양상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동성왕의 인물상도 검토하였다. 백제는 웅진초기 재건 과정에서 세력 간 갈등을 겪었다. 세력 간 대결이 반해구세력의 승리로 종결되면서, 倭에 있던 곤지의아들 동성왕이 10여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동성왕은 나이도 어렸고, 방계였으며, 세력기반도 미약했다. 때문에 동성왕 초기의 정국은 그의 옹립에 관여했던 세력이주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는 한성시기의 귀족인 진씨와 사씨를 중심으로 일부웅진 주변 세력, 일부 왕실 인물이 결합된 형태였다. 동성왕을 옹립한 진씨는 대고구려관계와 대내의 정치를 이끌었고, 사씨는 대외관계를 주도하며 동성왕 정권의 안정을 추구하였다. 진로는 동성왕 옹립세력의 대표 인물로 어린 왕을 대신해섭정에 가까운 형태로 초기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런데 웅진초기의 정치가 점차 안정되는 한편 동성왕이 장성하게 되면서, 동성왕은 옹립세력이 주도하는 정국에 변화를 주고자 했다. 18세 즈음의 성인이 된동성왕은 8년에 백가를 위사좌평에 임명하며 친정체제를 갖추려고 하였다. 이후다양한 인물을 등용하고 왕실을 복원하는 등 지배세력의 확대·조정을 통한 세력재편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즉위에 관여한 세력의 지위가 높았음이확인된다. 따라서 동성왕이 친정을 도모하던 시기에도 옹립세력의 힘을 극복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동성왕은 이들과의 공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성왕 19년 옹립세력의 핵심인물인 병관좌평 진로가 죽으면서 동성왕은 또 한 번의 정치변동을 모색하였다. 동성왕은 진로의 후임으로 燕突을 임명하면서 권력집중화를 추구하였다. 이후 직임 좌평들을 통해 세력을 조정하는 형태로왕권을 강화하였던 정책방향을 수정하여 측근을 통해 권력을 왕 자신에게 집중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추진한 대표적인 권력 강화책이 사비로의 천도 계획이었다. 동성왕은 이를 통해 귀족들을 제어하고 권력집중을 도모하였다. 하지만동성왕은 귀족의 힘을 제어할 수 없었고, 無道暴惡한 失政의 君主로 전락하면서시해되었던 것이다. 동성왕을 제거한 國人은 바로 이들 귀족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동성왕을 즉위시켰고, 또 폐위시켰던 것이다. 때문에 동성왕을 전제군주로 인식하기보다는 웅진 천도의 혼란을 극복하고 왕권의 확립을 추구한 왕으로 파악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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