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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46권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335 - 364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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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변호사 이창휘의 농촌계몽운동과 항일변론활동을 연구한것이다. 이창휘는 몰락한 양반의 후손으로 제주의 가난한 소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고학으로 어렵게 공부하여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전주지방법원 판임관견습(서기보)로 재직 중1924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에서 변호사개업을 하였다. 변호사 개업 이후 그는 형사공동연구회의 주요멤버로서 김병로, 허헌, 이인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사건 등 항일독립운동가들을 무료변론하며 법정투쟁을 통한항일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가 개업한 이후 1932년 현재까지 담당한 사건의 60% 는 이른바 ‘사상사건’ 즉 항일독립운동 사건이었다. 한편 1925년 천도교청년당과 농민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비천도교계 사회 인사들의 주도하여 창립한 조선농민사의 중앙이사로 선임되어, 농촌계몽운동과 농민운동에도 헌신했다. 또한 1927년 좌우합작으로 신간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경성지회간사를 맡아 항일민족운동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그러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항일독립운동 사건의 변론과 농촌계몽을 위한 강연회 강사로 활동하면서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불경기에 따른 가계 재정의 악화까지 겹쳐 1933년 함북 웅기로 변호사사무실을 이전하여 요양하고자 하였다. 이렇게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항일변론 활동을 전개하다가 결국1934년 9월 10일 웅기의 한 여관에서 급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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