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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석당논총 석당논총 제61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293 - 333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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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재계 4雄’ 중 한 사람이자 조선 ‘식민자’인 후쿠나가 마사지로는 1864년 1월 5일 일본 오우미 간자키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6년 1월, 23세에 부산에서 다카세상점을 경영하고 있던 숙부 다카세 마사타로의 권유로 도선하여 50여 년을 부산의 대자본가로 군림하였다. 원래 일본으로부터 잡화를 소액으로 수입하여 판매했던 다카세상점은 후쿠나가의 권유로 면포의 수입 판매를 주 업무로 한 이후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그는 다카세상점의 기초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힌 1900년대 중반부터 면화 재배를 시작하였고 아울러 191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토지 매수와 간척사업을 진행하여 대지주가 되었다. 소작제 농장 경영을 통한 면화와 미곡의 일본 유출과 판매는 총독부의 당시 시책과 어우러져 소강상태에 접어든 면포의 수입 판매 활동보다 훨씬 더 높은 수익을 보장하였다. 한편 후쿠나가는 부산상업회의소 특별의원, 부산일보사 대주주, 조선와사전기 대주주 등의 활동을 하면서 부산의 지역 원로로서 우월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부산의 대표적 자본가 가시이 겐타로와 함께 부산상업실천학교를 설립하였고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부산 재조일본인사회 최초의 기부단체인 부산공생원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활동영역을 경성으로까지 넓혀 화광교원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의 조선에서의 모든 활동은 ‘국가주의’의 실현이었고 활동의 결과는 ‘식민주의’와 분리될 수 없었다. 즉 후쿠나가는 전형적인 ‘풀뿌리 식민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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