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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포은학회 포은학연구 포은학연구 제20권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35 - 63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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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주자성리학이 심성논쟁을 거치며 심학화된 조선성리학으로 변모해갔다. 이를 반영하듯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명종 9년에 영천에 포은 정몽주를 모신 임고서원이 사액을 받으니 선조 6년에 개성에 숭양서원을 세워 선조 8년에 사액을 받는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정묘 병자호란을 거치며 척화를 주장하던 청음 김상헌이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와 효종대에는 북벌론을 주도하여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 현종대에 종법논쟁인 예송이 일어나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여 1차예송은 서인이 승리하여 정국을 주도해간다. 이에 현종 9년에 숭양서원에 김상헌을 배향하여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계승해간다. 김상헌의 손자인 문곡 김수항, 곡운 김수증, 증손자인 농암 김창협, 현손인 미호 김원행으로 이어지며 숭양서원은 서인이 주도하는 서원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2차 예송에서 서인 패하고 숙종 초반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다가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이를 반영하듯 숙종 7년 잠곡 김육, 포저 조익을 숭양서원에 배향하여 숭양서원은 다시 서인이 주도하는 서원으로 굳건히 자리잡는다. 영조대 두문동 72현의 절의를 추모하며 개성에 추모비를 세우자, 두문동 72현을 대표하는 정몽주를 모신 숭양서원에 우현보, 조견, 이고 등 두문동 72현을 숭양서원에 배향하자는 논의가 일어나 정조 8년 우현보를 대표로 배향하였다. 이에 도곡 이의현이 주도하여 포은 문집도 내고 제향도 주도하였다. 이를 이어 청음의 현손인 김원행이 위패를 고치고 제향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남유용은 숭양서원에서 삼선생춘추향축문(三先生春秋享祝文)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렇게 영조 정조대 노론이 주도하던 숭양서원은 순조 23년(1823)에 유수 김교근(金敎根, 1766∼?)과 김이재(金履載, 1767∼1847)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중건하고 사우와 강당을 중수하는 등 순조 이후에는 안동 김씨 등 노론이 주도하는 서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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