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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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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77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225 - 255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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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6세기의 유학자 묵재 이문건이 쓴 󰡔양아록(養兒錄)󰡕과 󰡔묵재일기(默齋日記)󰡕를 통해서 역동적인 노년의 삶을 살았던 묵재의 사상을 모색한 것이다. 특히 묵재는 유배생활을 하는 유학자의 신분이면서도 자신의 손자였던 숙길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쏟으며 겪어야 했던 절박한 이상과 첨예한 갈등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유학자로서의 위상에 있어서 심각한 위협을 무릅쓰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같은 묵재 자신에 대한 위협은 유학자로서 금기시해야 했던 불교와 무속, 도교의 의례를 거행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처신은 유배지에서 어렵게 얻은 손자에 대한 한없는 기쁨이자 동시에 노년의 묵재에게 가문을 이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16세기의 불교와 도교, 무속은 왕실로부터 그 의례가 공공연히 거행되었다. 이에 대한 연원은 이미 14세기를 국행의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불교와 무속의 위상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묵재의 태도에 비해서 같은 시기에 사우의 관계로서 지내면서 󰡔묵휴창수(默休唱酬)󰡕에 참여했던 퇴계 이황의 경계처와는 판이함을 확인할 수 있다. 노년의 묵재가 󰡔양아록󰡕에서 보여주었던 손자의 양육에 대한 기록은 섬세하다 못해 철저히 자신의 경계로 삼았다. 하지만 정암 조광조와 사승관계였던 노년의 묵재는 사림의 정도를 벗어나 무속과 도교의 초제(醮祭)까지 치르면서 자신의 가문과 가족들을 위한 축원과 액병의 의례에 전념했다. 이는 유학자로서의 변절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양아록󰡕과 󰡔묵재일기󰡕에서 임종 직전 까지 유학자로서의 위상을 묵수했고, 이러한 정신을 손자에서 계승시켜 주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를 반증하는 일례는 그의 신체적인 심각한 변화에서 그대로 노정되고 있다. 69세가 되던 해에 묵재는 우측시력을 잃었고, 그 해에 좌측시력 마저 제대로 볼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 하지만 유학자의 정도(正道)를 손자에게 전수하려는 묵재의 신념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조차 막을 수 없었다. 묵재의 손자에 대한 사랑은 초기부터 끊임없는 액병때문에 묵재의 심신은 초췌해 졌다. 그러나 자신의 의약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손자를 구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모색했다. 그런데 그가 곧바로 직면해야 했던 손자의 양육 과정은 중.후기에 이르면서 묵재의 이상과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다시 말해서 손자에 대한 그의 행동이 조노(躁怒)와 체벌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하지만 그는 신체적인 급격한 변화, 즉 두 눈의 시력이 실명과 심각한 장애가 발생하게 되자 손자 숙길에게 가졌던 자신의 이상을 재고했다. 그 결과 그는 손자와의 소통을 위해서 기존에 취했던 조노와 체벌을 중단했고, 대신에 묵재 자신의 한계를 수렴하면서 노년의 삶을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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