蔡元培(1968-1940年)는 中華民國 초대 敎育總長(1912년 1월4일-7월)이다. 그는 淸末 學部가 정한 忠君· 尊孔· 尙公· 尙武· 尙實의 5개항 교육이념 중에서 忠君은 공화정체와 맞지 않고, 尊孔은 신앙의 자유에 어긋난다며 폐기를 주장하고, 새로운 교육이념으로 軍國民敎育․實利敎育․公民道德․世界觀․美育의 5개항 및 ‘淸學堂管理通則’의 ‘學校不拜孔子案’과 ‘儀義式規則案’을 제안하였다. 또 그의 제안에 의해서 「學校管理章程十條」및 學校系統表·學校儀式規定,등이 만들어지고, ‘小學讀經科一律廢止’ ‘淸學部頒行之敎科書一律禁用’하는 새로운 규칙안 등이 만들어져서 공포되었다. 이 법안은 교육에서 2천년 이상 ‘獨尊의 지위’에 있던 孔子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學校不拜孔子’ ‘小學讀經廢止’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통지식인에게 ‘讀經’은 ‘儒家의 經典을 읽는다’는 단순한 의미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儒家의 가르침에 의하면, 讀經을 통해 금수에서 도덕적 인간,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 또 그 도덕적인 사람들이 이룬 문명국이 中華이다. 이 때문에 전통사회에서 경전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신성함으로 자리했다.
‘小學讀經廢止’는 학자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곧 전국적으로 孔敎運動이 발생했다. 보수파들은 결집하여 孔敎會 등 尊公을 이념으로 하는 단체를 만들었다 孔敎운동은 긍정적으로 보면 萬世師表인 孔子에 대한 숭배와 敬畏의 심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勢가 확장되면서 孔敎를 國敎로 하자는 청원이 쇄도하고, 급기야 그런 정서를 이용한 황제제 부활을 기도하는 復辟運動이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근대교육은 전통 속에 깊이 함몰돼 있는 민중을 근대적 민주적 인간유형으로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특수하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교육을 통해 민주공화정에 상응하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유형을 계획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길러내야 했다. 공교운동에 맞서 신지식인들의 反유교운동도 본궤도에 올랐다. 그리고 孔敎問題는 민국 초기 최대의 정치적 현안이 되어갔다.
채원배는 1917년 北京大學 교장 시절 펼쳤던 북경대학 개혁도 큰 흐름을 만들었다. 그는 잡지『新靑年』의 필진 등 신지식인들을 대거 북경대학에 교수로 초빙해 신․구사조의 충돌을 야기했고, 그것은 五四新文化運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그는 신․구지식인으로부터 ‘新文化運動的支持和贊助者’ ‘反孔敎反傳統的中心人物’로 인식됐고, 보수파의 공격 초점이 됐다.
그러나 그는 反傳統主義者는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생존의 원리를 유교에서 추구했다. 孔敎派 학자들이 공자숭배에 집착했고, 위정자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유교를 부활시키려고 한 이유와 달리, 11년을 해외에서 유학한 신지식인 蔡元培가 진보적 교육개혁을 추진하면서, 儒敎에서 개혁의 이론을 찾았을까하는 점은, 채원배의 글을 통해서 보면, 그의 孔子에 대한 존경뿐만이 아니라, 공자의 가르침 자체가 윤리적으로 없앨 수 없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고, 그의 사상의 근간은 儒家사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유가사상의 내용인 仁· 義· 恕· 智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보였고, 유가사상을 서양 사상인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해석하면서, 거기에서 중국 생존의 가치를 추구하려 했다. 중국문화를 위한 자양분으로‘ 선택된 善’이 자유 평등 박애이다.
그는 자유 평등 박애를 도덕의 근원으로 여기고, 민국 초기의 교육이념을 설명한 「對於敎育方針之意見」에서 자유 평등 박애를 새로운 공화시대의 도덕의 지침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 평등 박애는 서양도덕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옛날의 중국 철학가들도 이를 주장하고 일상에서 실행했다고 한다.
또 서양 사람들에게 중국의 사상을 소개한 저작 중에 蔡元培의「中國的文藝中興」에서도 중국의 전통문화와 서양문화는 대립하지 않으며, 프랑스인이 제창하는 자유 평등 박애는 儒家가 제창하는 仁 誓 義와 융합된다며, 유가 사상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蔡元培의 동서 문화 융합의 원칙에 의한 것인데, 그의 중국문화에 대한 주장이 증명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이지만, 이것은 전통사상에 대한 그 나름의 독창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