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광서 24년(1898)에 일어났던 무술변법(변법자강운동)은 중국 근대사
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무술변법은 자희태후(서태후)가 일으킨
정변―무술정변에 의해 결국 실패로 끝났다. 무술정변의 발생 원인에
대해 자희태후를 우두머리로 한 완고 보수세력의 반격으로 보는 관점
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자희태후가 개혁을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광서
제가 ‘제도개혁(更新国是)’을 선포 할 때부터 저지하였을 것이고, 그렇
게 되면 모든 개혁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데 왜 백일하고도 삼일이
지나서야 정변을 일으켰는지? 이것이 많은 사학자들이 ‘보수 세력의
반격’설을 놓고 엇갈린 주장을 펴고 있는 원인이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원세개(袁世凱)의 밀고가 정변의 원인이라고
하는데, 이런 설도 문제점이 있다. 광서 24년 8월 3일(양력 9월 18일)
밤, 담사동(譚嗣同)은 비밀리에 원세개를 방문하여 직예총독 영록(直隸
總督榮祿)을 처형하고 군대를 풀어 의화원(頤和園)을 포휘할 것을 부
탁하였다. 원세개는 8월 5일(9월 20일) 천진에 돌아가서야 영록에게 모
든 사실을 밀고했다. 따라서 그가 영록에게 밀고한 시간은 빨라야 8월
5일 저녁 이후일 가능성이 높은데, 자희태후가 정변을 일으킨 시간이
8월 6일(9월 21일)인 점을 감안하면 어떻게 하루 만에 천진으로부터
밀고를 받아 정변을 획책하였는지? 사학자들은 시간적으로 너무 빠듯
한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본고는 무술정변 발생의 진정한 원인은 무술변법시기 강유위(康有
為) 등 변법파들이 일본 전임 수상 이토 히로부미와 영국선교사 티모시·리처드 등의 유세에 넘어가 ‘중국, 미국, 영국, 일본의 4국 합방’ 계
획을 시도한데 있다고 본다. 자희태후는 사태의 엄중함을 인식하고 제
때에 결단을 내리고 정변을 일으킨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관점은
설득력이 있는지? 이 문제는 ‘합방’의 유래로부터 알아보아야 할 것이
다.
2. 무술변법 이전의 ‘합방’론
중국어에는 ‘합방(合邦)’이란 어휘가 없었다. 이 어휘는 일본으로부터
전해 온 것이며, 모리모토 도키치라는 일본인이 메이지26년(광서 19년,
1893)에 쓴 ‘대동합방론’이란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한
국이 일본과 하나의 국가로 되어야 한다고 표방하였지만, 결국 합방의
목적은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데 있었다. ‘합방’이라는 중간적 어감의
어휘를 선택한 것은 침략과 병탄의 의도를 덮어보려는 의도였다고 생
각된다. 광서 20년(1894) 중일갑오전쟁(청일전쟁)이후 중국 내 반일정
서가 한껏 고조된 상황에서 일본은 중국의 지식인을 상대로 적극적인
유세(遊說)를 펼쳤다. 광서 22년(1896, 일본 메이지 29년), 일본 정계
대부 이누카이 쓰요시는 “중국 문제는 처리하기 쉽지 않으므로 대중국
정책을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였다. 광서 23년(1897), 일본
인 宗方小太郎은 상해에서 평소 가까이 지냈던 이성탁(李盛鐸), 나성백
(羅誠伯), 양계초(梁啟超), 왕강년(汪康年) 등 사람들과 아시아 부흥의
계책에 관해 논의하였다. 광서 24년 무술변법의 시작에 앞서 일본은
‘동아회(东亚会)’, ‘동문회(同文会)’ 등 기구를 설립하여 강유위, 양계초
등 당시 변법파 핵심인물들을 적극 끌어들였다. 광서 24년 초에 강유
위는 심지어 중국주재 일본공사 야노 후미오와 중·일 양국의 ‘합방대
회의(合邦大會議)’를 개최할 계획까지 세웠다. 무술변법이 시작되기 전
부터 일본이 중국과의 ‘합방’ 추진을 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
다.
3.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에 왔을 때 ‘인재영입(借才)’의 의미
광서 24년, 광서제는 변법유신에 관한 강유위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그 해 4월 23일(6월 11일) 조서를 내려 ‘제도개혁’을 정식으로 진행하
였다. 이것이 바로 무술변법, 백일유신의 시작이다. 변법이 시작된 후
낡은 기관 축소, 군대의 서양식 훈련, 과거제도(팔고문 폐지, 책론<策
论> 시험) 개혁, 신식 학교 설립, 공상업 발전 등 새로운 정책이 잇따
라 실시되었다. 하지만, 청조 정부의 각종 개혁정책이 부단히 반포·실
시될 때 변법파의 관리들은 ‘인재영입’, ‘합방’ 등 계획을 제기하기 시
작하였다. 이러한 관점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형부주시(刑部主事)
홍여충(洪汝沖)이다. 그는 광서제에게 상주문을 올려 서양의 제도를 본
받을 바에는 ‘동서 각국의 명사<名士>’를 초청하고 실권을 주어 중국
의 개혁을 돕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일본 수상직을 사임
하고 중국의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관작을 하사
하고, 수시로 자문을 구하여 신정개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황제의
가까이에 둘 것을 건의하였다. 여기에서 홍여충이 ‘동서 각국 명사’의
이상적인 적임자로 이토 히로부미를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홍여충은 ‘국가결합(联邦)’까지 주장한 인물이다. 즉 중국과 일본
의 관계는 “유럽이나 서양에 있었다면 한 나라로 합치는 것도 무난했
을 것이다”고 말하면서 중국과 일본은 합병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광서제가 이런 상주문을 받고 무슨 반응을 보였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홍여충의 말대로 7월 26일(9월 11일) 이토 히로부미는
정말로 중국에 왔다.
강유위는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에 도착하자 곧바로 상해에 있는 영
국선교사 티모시·리처드를 북경으로 초청하였다. 티모시·리처드는 일찍
광서 21년(1895) 중국이 갑오전쟁에서 패배한 후 ‘신정책’이라는 책을
써 중국의 외교, 신정, 철도, 차관, 신문, 교육 등 분야의 권력은 모두
서양인이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적이 있다. 무술변법이 시작된
후 그는 강유위와의 만남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을 강국으로 발전
시켰다는 점에서 보아 그를 황제의 고문으로 위촉하면 중국정부에게
가장 득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티모시·리처드가 북경에 도착한 후 이토 히로부미가 머물고 있는 여관에 거처를 정한 것으로부터 두 사람
의 관계가 아주 각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에 온 후 광서제는 칙령을 반포하여 국내 및
동서 각국의 전문가들이 무근전(懋勤殿)에 모여 국가 정치제도의 개혁
문제를 함께 논의하도록 하였다. 변법파 관리들도 잇달아 상주문을 올
려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변법개혁에 관한 조언을 구할 것을 요청하였
다. 그 예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섭흥은(聶興圻)은 중국의 개혁
에 일조할 수 있도록 외국 인재를 등용할 것을 광서제에게 주청했다.
진무정(陳懋鼎)은 광서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만날 때 일본 메이지유신
의 경험에 대해 논의하기를 희망하였다. 복자동(濮子潼)은 광서제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북경에 있을 때 총리사무왕대신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개혁에 관련된 조언을 구할 것을 요청하였다. 상기 의견보다 더 극단
적인 의견도 있었는데, 귀주 거인(举人) 부기(傅夔)는 이토 히로부미에
게 재상과 대등한 관직을 하사할 것을 희망하는 상주서를 올렸고, 진
시정(陳時政)도 이토 히로부미에게 신정개혁의 실제사무를 맡길 것을
희망하는 상주서를 올렸다.
당시 북경의 관료사회에는 ‘무근전을 열고’, ‘이토 히로부미를 중용’
하는 문제와 관련된 소문이 널리 퍼졌다. 다른 일각에서는 이런 소문
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관리들도 있었다. 8월 3일(9월 18일) 어사 양숭
윤(楊崇伊)은 자희태후에게 “광서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등용하면 조상
이 물려준 강산이 멸망의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고 진언하였다. 그
당시 자회태후는 의화원에 머물러 있으면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으나, 모해건(茅海建)선생님의 연구에 의하면 군기처(軍機處)
는 매일 일반적인 상주문의 요점과 중요한 상주문 전체를 베낀 사본을
자희태후에게 전하였을 것이라 사료된다. 양숭윤의 보고를 접한 자희
태후는 한편으로 신정과 관련된 모든 상주문을 올리도록 군기처에 명
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광서제의 생각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8월
4일 자금성으로 돌아왔다.
4. ‘이화원 포위’와 ‘합방’ 계획
8월 3일, 이날에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였다. 첫째는 양숭윤이 자희
태후에게 상서한 일이고, 둘째는 이날 저녁 담사동이 원세개를 찾아간
일이다. 담사동은 원세개에게 직예총독 영록을 죽이고 군사를 풀어 이
화원을 포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8월 5일 천진에 돌아
가 영록에게 이 일을 고해바쳤다.
이외에 우리는 두 가지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진황도,
산해관 일대에 영국군함이 출현하였고 군함에서 내려온 영국 사병이
중국인에게 ‘러시아의 의도가 불순하니 영국정부가 중국을 보호하고자
군함을 파견하였다’고 하였다. 영국과 러시아가 조만간 전쟁을 할 것
같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또한 중국의 동북에서도 영국과 일본이 러시
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였다는 헛소문이 돌고 있었다.
8월 3일 저녁 강유위는 변법파 관리인 양심수(楊深秀), 송백노(宋伯
魯) 등 사람을 만나 티모시·리처드가 전한 ‘영토분할도(瓜分图)’를 보여
주면서 “사람을 많이 찾아 상주문을 올릴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계획적인 행동임을 입증하는 예이다. 8월 5일(9월 20일), 이토 히로부
미가 광서제를 알현하는 날, 강유위의 지시를 받은 양심수는 광서제에
게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해 “영국, 미국, 일본과 연합하지 않으면 국가
의 생존을 도모할 방법이 없다”고 상서하였다. 또한 광서제가 “영국,
미국, 일본과 굳게 연합할 것을 조속히 결정하고 ‘합방’이란 이름이 아
름답지 않은 것을 개의치 말 것”을 희망하였다. ‘합방’이란 말이 정식
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 이튿날인 8월 6일, 즉 정변이 발생한 당일, 광
서제가 ‘인재영입’, ‘합방’ 등 사안에 대해 조속히 결정을 내릴 수 있도
록 다른 한 변법파 관리인 송백노도 광서제에게 상서하였다. 그는 러
시아에서 중국을 분할하려는 계획과 지도가 신문에 실렸다고 주장하면
서 “티모시·리처드가 중국, 일본, 미국 영국의 합방을 시도하고 있으며,
네 개 국가에서 함께 당면한 정세와 각국의 제도에 밝은 사람 백 명을
뽑아 네 개 국의 군대, 정치, 세금(兵政稅) 및 모든 외교 사무를 맡겨
야 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합방’의 계획이란 바로 중, 미, 영, 일 4국에서 ‘군대, 정치, 세금 및 모든 외교 사무’와 관련한 권력을 네 개
국가에서 공동으로 선출한 백 명이 장악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실
제로 이것은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로 확연히 드러나는 외교적
사기이며, 중국의 정치권력을 빼앗아 마음대로 짓밟으려는 의도가 깔
려 있는 것이다.
자희태후가 신정 관련 상주문을 파악하고 있는 정도, 그리고 양숭윤
의 상주문으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추론하여 볼 때 그는 ‘동양의 전직
수상 이토 히로부미를 등용’하는 문제를 아주 중요시했을 것이며, 또한
양심수의 상주문을 볼 ‘능력’과 ‘의향’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때문
에 자희태후는 변법파의 ‘합방’ 계획을 발견하자 곧바로 문제의 심각성
을 깨닫고 그날 즉시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하였던 것이다.
티모시·리처드와 이토 히로부미가 ‘합방’ 계획과 밀접히 연관되지만,
영, 일 양국 정부가 이 일에 개입되었는지는 후속 연구를 통해 밝혀져
야 할 것이다. 모해건 선생님은 일본 외무성 자료에 대한 분석을 통해
무술변법에 대한 일본정부의 태도가 냉담했으며 구체적인 지시나 의견
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례 보고는 일본의 진정한
의도를 반영하지 못할 수도 있다. 중국주재 영국공사 맥도날드(Sir C.
MacDonald)가 8월 초에 해군중장 세이무어(Vice-Admiral Sir E.
Seymour)를 만난 후, 세이무어는 함대를 거느리고 짧은 순항을 하였
으며, 바로 이때 영국사병이 ‘영국과 러시아가 곧 전쟁을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맥도날드와 세이무어가 이런 방식을 통해 ‘합
방’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광서제에게 압력을 가했는지 현재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영국과 일본의 문서에 ‘합방’의 내용이 기록되
지 않았다 하여 당시 ‘합방’ 계획이 존재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양
심수, 송백노의 상주문과 강유위의 ‘자편년보(自编年谱)’에는 ‘인재영입’
과 ‘합방’ 계획이 명백하게 기재되어 있으며, 영국선교사 티모시·리처
드와 일본 전임 수상 이토 히로부미가 모두 이 일에 참여하였음이 실
증되었기 때문이다.
5. 결론
한국이 일본에 의해 합병되는 과정 중 1985년 ‘을미사변’이 일어났
다. 이 사변에서 민비(명성황후)가 살해된 것은 담사동이 원세개를 찾
아서 부탁했던 ‘이화원 포위’ 계획과 아주 유사하다.(계획이 성사되었
다면 자희태후도 똑같은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1904년 일본은 한국
으로부터 군대주둔권을 획득하고 재정고문, 외교고문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송백노가 ‘군대, 정치, 세금 및 일체 외교 사무’를 외국에 맡겨
야 한다고 주장했던바와 아주 흡사하다. 그 뒤 1910년 일본은 ‘합방’의
명의를 빌어 한국을 병탄하였다. 한국의 가슴 아픈 교훈을 통해 ‘합방’
이란 다른 나라를 병탄하려는 음모임을 보아낼 수 있다.
본고는 자희태후를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하려는 의도가 없다. 자희
태후는 단점이 많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무술정변이라는 역사적 사건
에서 자희태후는 나라의 운명을 수호하였고, 중국을 분할과 병탄의 위
기로부터 구해냈다. 강유위, 담사동, 양심수, 송백노 등 ‘인재영입’과
‘합방’을 주장한 주요 인물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자의 음모에 의
도적으로 동참했는지, 아니면 변법 목적 달성에 급해 이토 히로부미와
티모시·리처드의 간계에 속아 넘어갔는지를 불문하고, 중국을 분할과
병탄의 위기에 처하게 하였으므로 과오가 아주 크다. 상기 분석을 통
해 무술변법 및 무술정변의 역사에 대해 기존의 전통 학설과 완전히
다른 해석과 평가를 도출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