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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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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20권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87 - 227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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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한국사에서 동경이란 지명은 경주를 가리키는 일명으로 된 적이 있으며 지금껏 그런 인식은 이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주를 동경으로 부르기 시작한 시점을 고려 초 成宗 때의 일이라 이기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인식은 여러 모로 再考의 여지가 높다. 왜냐하면 그보다 훨씬 앞서 신라 때부터 왕경을 동경이라고 부른 몇몇 사례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9세기 후반에 지어졌다는 處容歌란 鄕歌에 동경이란 지명이 보인다. 이를 고려시대의 것이 그처럼 추기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모든 향가를 그렇게 볼 가능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특히 9세기 초 경남 山淸의 斷俗寺에 세워졌던 神行禪師碑에 신라 왕도를 동경으로 불렀던 사례가 보임은 신라 때부터 경주를 동경이라 불렀던 결정적 자료로 손꼽을 수 있다. 이처럼 신라 왕도를 동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고려 초가 아닌 신라 때부터라면 이는 여러 측면에서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생겨난다. 언제 어떤 배경에서 동경이라 불리었으며 그것이 갖는 의미나 의의가 어떨까 하는 등등의 문제들이다. 늦어도 8세기 중엽부터 신라인들은 자신의 왕경인 金城을 동경이라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그 밑바탕에는 당시 크게 高揚된 문화 수준과 그에 따른 自尊의식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와 대등하다는 자존 아래 그 수도였던 長安이 西京으로 불린 데 대한 대응으로서 금성을 동경이라 부르는 인식이 생겨나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공식적 입장은 아니었으며 일각에서 당 문화 일변도에 대한 대응이다. 그런 점은 822년 金憲昌이 난을 일으키면서 국호를 長安이라 내세우고 慶雲이란 연호까지 사용한 데도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만일 이런 추정이 설득력을 갖는다면 앞으로 신라의 내부 문제 뿐만 아니라 羅唐의 외교관계도 전면적 재검토를 거쳐야할 부분이 적지 않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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