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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걸순 (충북대학교)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제64호
발행연도
2019.6
수록면
91 - 12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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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과 이상설은 인척 간으로 죽마고우이자 동지로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이 글은 두 사람의 독립운동론과 독립운동을 비교사적으로 고찰하여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들의 초기 독립운동의 방략은 독립운동 기지 개척론으로 일치하였다. 먼저 이상설이 가산을 정리하고 1906년 망명하여 무장투쟁의 기틀을 닦았다. 이상설은 고향 진천의 토지와, 서울의 토지와 저택을 매각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충당하였다. 이회영의 재산 처분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이 또한 신민회의 방략에 따르고 이상설과 협의한 결과이다. 이회영과 이상설은 막대한 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독립운동을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1908년 이회영과 이상설의 블라디보스토크 만남은 향후 독립운동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회동이었다. 이회영은 이상설이 강조한 국제 정세를 이용한 기회포착론을 귀국 직후 실천에 옮겨 나갔다. 그러나 활동의 시·공간적 차이는 두 사람 간 사상과 방법론의 차이를 초래하였다.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아나키스트로 전회한 것은 그가 처해 있던 시대적·지역적 조건의 차이에 따른것이었다.
이회영과 이상설은 고종과 특별한 관계를 지닌 인물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고종의 망명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그들의 정체론이 보황주의나 근왕적 사고로부터 탈피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상설이 대한광복군정부 정통령에 추대된 것을 두고 고종과 절연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후 이회영의 고종 인식과 정체론은 고종의 죽음과 베이징 망명 이후 아나키즘의 수용으로 변화하였다고 이해함이 타당하다. 즉 이상설이 고종을 중심으로 한 정체론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던 반면, 이회영은 당초의 정체론에만 고착되지 않고 새로운 정체론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독립운동 자금의 마련
Ⅲ. 무장투쟁론에 대한 인식
Ⅳ. 고종에 대한 인식과 정체론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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