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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상도 (건국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발행연도
2018.11
수록면
121 - 164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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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한 김원봉은 “우리군대는 농민 즉 인민의 군대다. 농민의 이익을 위하여 싸우고 또 보호하겠다.” 장차 조직될 국군은 대다수 피지배계급의 안전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민중이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이와 함께 귀국 직후 그는 주요 정치세력들과의 연대에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독립운동 시기 협동전선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좌우합작에 대한 의지가 강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다가 비상정치회의와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통합함으로써 임정법통론이 꺾이는 결과를 낳자, 그는 성주식·김성숙 등과 임정을 탈퇴하였다. 그의 귀착지는 민전이라는 좌익 통일전선이었다. 국가 건설의 주도권 장악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경쟁이라는 현실을 선택한 셈이다.
민전의장으로서 김원봉의 활동은 민전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부응하는 결과로 나타났지만, 그는 조선민족혁명당(나중의 인민공화당)을 발판으로 독자적인 정치행보를 견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이래 미군정의 압박이 강화되면서 그 만큼 운신의 폭도 좁아졌다.
물론 ‘비공산주의 계열의 좌익 지도자’라는 평가처럼, 미군정 관리로 근무한 미국인의 눈에 비친 김원봉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더라면, 공산주의자들과 얽히지 않았을 인물이었으리라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지만, 아군과 적군의구분이 명확했던 해방정국기의 정치상황에서 연민이나 안타까움이 그를 보호해 줄 수는 없었다. 그는 좌익세력의 결집체인 민전의 의장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됨에 따라 새로운 파트너가 필요했을 북로당의 입장에서는 김원봉의 존재감에 주목하였을 개연성과 함께, 같은 해 가을 월북하여 북로당 지도부와 임시헌법 제정 문제 등을 논의했다는 사실 등은 그와 북로당의 연계관계가 축적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김원봉에게 평양은 삶의 도피처이자 새로운 활동무대로서 기대감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1947년 가을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더 이상 그가 설 땅은 없어졌고,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참가 명목으로 북행길에 올랐다.

목차

1. 머리말
2. 정치세력의 통합 노력과 좌절
3. 미군정체제 하 정치활동
4. 정치활동의 제약과 성격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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