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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유채연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62집
발행연도
2018.11
수록면
135 - 169 (35page)
DOI
10.18496/kjhr.2018.11.6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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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시대 아명도서의 사급과정과 그 운영을 살피고, 나아가 조선후기에 한정하여 아명도서의 사급과 운영이 대일정책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아명도서는 초기에는 쓰시마도주나 그 아들의 兒名으로 사급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쓰시마도주의 嫡子에게 사급되어 조선에 세견선을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조선시대 아명도서의 사급은 조선의 대일정책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전기 조선은 통교를 원하는 왜인들의 도서사급이 급증하면서 세견선을 제한하고 접대규정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무역 확대를 요구하는 왜인들의 변란이 잦아지면서 위기감을 느낀 조선은 쓰시마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쓰시마에 대해 세견선을 추가로 허락하고, 회수한 도서를 부활시키는 등 이전보다 완화된 태도로 전환하였다. 쓰시마도 조선의 東藩을 자처하며 왜구문제 해결에 협조하면서 아명도서와 그에 따른 세견선을 받는데 성공하였다.
임란 이후 조일간의 국교가 재개되는데 앞장섰던 쓰시마는 그 공을 인정받아 도주의 도서와 함께 그 아들의 아명도서를 허락받았다. 조선후기에도 쓰시마는 아명도서의 운영에 있어서 도서를 반납하지 않고 사송선을 유지하거나 막부의 명을 들어 아명송사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무역량을 증대해 나갔다. 당시 조선은 청의 감시와 견제를 받으면서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방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쓰시마의 계산을 알면서도 번번히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청의 지배질서가 안착되면서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확보하게 된 조선은 그동안 쓰시마의 잘못된 교섭관행을 바로잡고, 대일관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시작하였다. 1683년 宗義眞의 아들 右京의 도서를 거절함으로써 이전의 아명도서 사급 사례를 特恩으로 인식시켜 전례 가능성을 차단하고, 아명도서 사급은 조선의 재량권이 크게 작용하는 사안임을 쓰시마에게 명확하게 인식시켰다. 또한 1709년 쓰시마가 彦千代의 도서를 요청했을 때에도 조선은 당시 외교현안이었던 교간사건의 처리문제와 연결하여 1711년 신묘약조가 체결될 때까지 조선의 주장을 관철하는데 유리한 협상카드로 활용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조선전기 아명도서의 賜給과 운영
3. 조선후기 아명도서의 사급과 대일정책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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