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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유채연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82집
발행연도
2023.11
수록면
99 - 133 (35page)
DOI
10.18496/kjhr.2023.11.8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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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조·일 양국이 교간에 대한 처벌규정[신묘약조]을 합의하는 일련의 과정을 추적하여 조선의 대일외교에 대한 자세와 더불어 외교 역량을 확인하고자 한다.
신묘약조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교간은 양국의 사회·문화적 차이로 인해 외교문제로 비화된 사안이었다. 조선은 국내에서 발생하는 교간뿐만 아니라 왜관에서 발생하는 교간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처벌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이국 남녀의 접촉과 관계가 허락되는 분위기로, 동래부의 항의를 받을 때마다 왜관의 관수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를 설명하며 항변하였다. 이와 같은 양국의 인식차가 있음에도 그 간극을 좁혀 약조 체결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1711년 약조 체결에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1707년 교간사건을 해결하려는 조선의 의지는 매우 강하였다. 1708년 문위행을 통해 교간왜 동률 처벌[사형]을 약조화하는데 실패한 조선은 이후 다양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특히 조선은 대마도에서 요청한 彦千代圖書와 교간왜 처벌문제를 함께 검토하는 한편 대마도의 외교적 결례를 지적하는 서계를 작성하여 대마도를 압박하였다. 이에 대마도는 그동안의 교간에 대한 소극적인 입장에서 교간왜를 체포하고 나아가 약조를 체결하여 동률로 처리하겠다는 태도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대마도의 입장 변화가 곧바로 약조 체결로 이어지지 않았으나, 조선이 교간왜 처벌에 대한 대마도의 반응을 이끌어내는데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한편 조선이 교간사건을 처리, 약조로 체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변화는 대마도가 조선의 대일정책이 크게 전환되었음을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과거에 대마도가 분별력없이 강제로 밀어붙이면 해결된다는 식의 외교방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교간에 대한 조일 양국의 인식과 처벌
3. 1707년 교간사건과 양국의 대응
4. 1711년 통신사 파견과 신묘약조 체결
5. 신묘약조 성립의 의미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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