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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홍성익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인문과학연구 제53집
발행연도
2017.6
수록면
189 - 210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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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말여초기에 남종선이 한국에 전래되고 禪僧을 중심으로 부도라는 석조묘탑에 遺體 또는 舍利를 봉안하였다. 그런데 이 사리탑이 건립될 때 1인에게 1개의 부도가 건립되던 풍습에서 어느 시기엔가 舍利를 나누어 여러 개의 浮屠로 건립하는 풍습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간 한국의 분사리 부도의 기원을 840년대의 가지산문 도의라는 견해와 900년대의 사자산문 징효라는 견해가 있어 왔으나, 이 연구에서 고려말 나옹과 태고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이는 인도 승려이면서 元나라에서 주로 활동했던 나옹의 스승인 지공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이후 조선초기에는 분사리 부도가 함허와 학조 등에서 희소하게 나타나다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청허와 부휴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법맥을 중심으로 계보가 생겨 번성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분사리 부도를 건립한 승려의 수를 보면 고려말에 2인, 15세기와 16세기에 각 1명이었으나 17세기와 18세기에는 급속히 증가하여 각 17명과 16명에 이르고 19세기에는 급격히 감소하여 3명이 파악되고 있다. 이는 고려말에 승려의 분사리 부도 건립이 시작되었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주자학이 국시가 되어 고려시대와는 다른 정책이 실시되자 분사리 부도를 건립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지 못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僧將으로 활약했던 청허와 유정, 벽암 등의 활약으로 불교에 대한 정책이나 관료들의 인식변화로 불교계가 활발한 사회역할을 전개하였고 청허와 부휴계의 계보가 정립되고 계보간의 법맥을 현창하고자 하는 경향도 분사리 부도의 건립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이 글에서는 살피지 못하였지만 앞으로 분사리 부도의 건립이 조선사회의 정치·경제와 더불어 어떻게 연계되는지의 문제도 주목하고자 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분사리 부도의 발생과 계승
3. 분사리 부도를 봉안한 사찰과 부도 주인공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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