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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명준 (한림대학교)
저널정보
계명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동서인문학 동서인문학 제53권
발행연도
2017.6
수록면
31 - 52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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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휘종은 집권 4년에 대성악(大晟樂)을 완성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대내적으로는 황실의 존엄성과 통치의 정당성 확보하고 대외적으로 중화민족으로서 자부심 고취와 내부적 결속을 꾀하고자 하였다. 대성악은 정비 과정에서 음고(音高)표준, 음계(音階), 음역(音域), 정성(正聲) 중성(中聲) 제도 등에 대해 논쟁이 있었지만 존재의 가능성이 불분명한 고대 성인을 법 삼은 복고주의와 신비주의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송의 태묘악장은 16수로 1자1음, 1행은 4언, 4언 4구 혹은 8구로 되어있다. 악장은 정식(正式) 7성례에 따랐으며, 묘실(廟室)은 추존 4대와 태조와 태종 등 6실을 두어 악장을 제작하였다. 묘실 선정은 송 휘종 대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건국 군주를 중심으로 삼았다. 악장의 전개와 예찬 방식은 『시경』의전통을 본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비현실적 수사의 과잉으로 작품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악장의 정치적 효용성은 얻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예종은 대내적으로는 여진정벌과 천수사 사업의 실패로 왕권은 크게 위축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거란과 여진이 체제를 위협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예종은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송의 대성악을 수용하였다. 수입 이후 예종은 송의문화와 예제를 따르면서도 고려만의 개별성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태묘제와 악장을 정비해 나갔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구실등가(九室登歌)〉 9실 9장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고려는 독자적인 예제와 악장 제작의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예종 시대 태묘악장은 예찬 대상의 구체적인 행적과 공업을 제시하고 묘사함으로써 설득력과 공감대를 획득할 수 있다. 또한 후왕의 ‘효’를 강조함으로써 통치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현왕에게 체재 보전의 책무를 환기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예종 대의 태묘악장은 체재 유지 보전의 목표 아래 선왕-현왕-후왕간 상호 긴장감이 균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것들이 송의 태묘악장과 다른 고려만이 갖는 독자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대성악의 성립과 송의 태묘악장
Ⅲ. 예종 대의 태묘악장과 독자성
Ⅳ.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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