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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선숙 (국학연구소)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32집
발행연도
2017.3
수록면
7 - 47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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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중반 시기의 삼국과 중국 남북조의 교섭은 매우 역동적이었다. 즉,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북위 및 남조 양나라와 사활을 걸고 대외관계를 추진하였다. 백제는 472년경(蓋鹵王18)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행위에 대해 알리고 군사행동 요구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북위조정에서는 이러한 백제의 요청에 대해 고구려와의 관계나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의식하여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양국의 관계는 단절되고 만다. 물론 신라는 백제의 도움으로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기 전까지 중국왕조와의 독자적인 외교관계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신라 내물왕대에 고구려와의 화친이 성사되면서 겨우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후 정치적 군사적으로 간섭을 받던 고구려와의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면서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기에 이른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에 대항하여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와 군사동맹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양국은 인접한 여러 소국을 사이에 두고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충돌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당시 신라에 대한 양나라의 지식은 신라와의 왕래가 거의 없던 시기였으므로 직접 방문하거나 서로의 언어소통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다. 그 이전시대부터 전해져 온 인식 및 백제의 전언을 통해 알려진 내용들이었다. 그로 인해 실상과 조금 다르거나 백제에 비해 외교상에서의 약소국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양나라의 두 사서에서 신라에 문자가 없다고 한 기사는 북조의 역사서인 북사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남조의 역사서인 『남사』와 거의 유사한 내용이 실려 있다. 따라서 『양직공도』에 여러 소국과 함께 신라가 아닌 사라로 기술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정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당나라 시대에 편찬된 『양서』에 신라의 국명이 정식으로 사용된 것은 6세기 초반이 훨씬 경과한 이후의 사정과 사서 편찬 당시 사용된 국명과 함께 당나라와 신라의 우호적 교섭 관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5세기 후반∼6세기 초중반 시기의 동아시아 정세
3. 『양직공도』제기의 사라斯羅(國)와 『양서』 「동이열전」의 신라新羅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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