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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정치학회 21세기정치학회보 21세기정치학회보 제26집 제1호
발행연도
2016.3
수록면
141 - 168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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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기 발생한 조선피로인의 쇄환을 위해 조선-일본 간 그리고 조 선-후금(청) 간 전개되었던 쇄환교섭의 내용과 특성을 비교분석하려는 것이다. 먼저 조선-일본간 교섭의 경우, 전통적으로 쓰시마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대조선 교역요구가 강했고, 특히 임진왜 란의 종전과 에도막부의 성립이라는 대내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입장에서는 쇄 환교섭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국교재개를 강력히 원하는 일본의 입장을 활용하여 사절단의 파 견 등으로 나름 피로인 쇄환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경이 바탕이 되었다. 대등교 섭이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쇄환전략과 주체, 수단 및 방법을 적극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리적 여건의 불리함, 쓰시마와 막부의 조선피로인 쇄환 지연전략, 이미 일본 에 정착하여 동화된 조선피로인들의 귀국 거부, 그리고 귀국 후의 처우문제 등으로 인해 전원쇄 환이라는 목표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승자였 던 후금(청)과의 쇄환교섭은 이와는 달랐다. 명과의 중국대륙의 지배권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후금(청)으로서는 조선피로인의 존재가 매우 귀중한 인적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지 닌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과는 달리 조선피로인 쇄환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식량 등 물적 자원 의 확보를 위한 속환의 원칙 정도만 제시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정묘호란 직후에는 개시와 속환을 통한 조선피로인 쇄환과 주회인 쇄환 요구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어느 정도 성 과를 거둘 수 있었다. 나름 쇄환교섭의 전략과 수단이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 후에는 전혀 다른 대안들을 추구할 수 없었다. 명․청 간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당시 현실에 서 조선피로인의 필요성에 대한 청의 입장이 강경하기도 했거니와 속환을 위한 재원마련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선의 국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수 십 만의 조선 피로인이 중국 대륙에서 ‘잊혀진 조선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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