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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구지현 (선문대학교)
저널정보
동악어문학회 동악어문학 한국어문학연구 제63집
발행연도
2014.8
수록면
37 - 61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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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일본에 3차례의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하였다. 1607년 외교가 재개된 첫 번째 사절에게 일본은 많은 배려를 베풀었다. 쓰시마와 막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이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많은 피로인들이 사신을 따라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미 귀국을 거부하고 일본에 정착하려는 포로들이 생겨나긴 했지만, 사신 일행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 일본인만을 비판할 뿐이었다. 1617년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사신들에게는 막부나 쓰시마와의 교섭 외에 피로인에게 귀국의 정당성을 알리며 설득하는 과제가 늘어난 것이다. 쇄환을 위해 데려온 포로가 다시 돌아가 버리거나 따라왔다가도 마음이 변해 가버리는 일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피로인은 설득의 대상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할 조선인이었다. 1624년 회답겸쇄환사에게는 자발적으로 돌아가겠다고 찾아오는 피로인이 드물 정도가 되었다. 이미 세대가 바뀌어 완전히 일본 습성에 젖은 포로들이 등장했다. 사신의 눈에 잔류한 조선인은 금수이거나 오랑캐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1636년과 1643년에도 극소수의 쇄환이 있기는 하였으나 본격적인 포로의 쇄환은 1624년으로 막을 내렸다. 잔류한 조선인은 일본 내에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통신사로 사절 명칭이 바뀐 후, 조선인의 후예임을 밝히며 사신을 방문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 실절한 조선인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조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회답겸쇄환사의 포로 쇄환 인식
3. 맺음말
Abstract
참고문헌

참고문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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