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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정치학회 21세기정치학회보 21세기정치학회보 제25집 제1호
발행연도
2015.3
수록면
53 - 79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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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박정희와 같이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던 황용주는 1933년 마르크스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황용주는 1945년 광복 직후 고향인 밀양출신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보좌했으나 약산이 월북하게 되어 월북자의 측근이라는 전력도 가지게되었다. 황용주는 박정희가 1963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을 내거는데 기여했다고 후일 회고했다. 그런 황용주가 1964년 9월 문화방송 사장에 있으면서 ⌈세대⌋지 11월호에 “强力한 統一政府에의 意志: 民族的 民主主義의 內容과 方向”을 게재했다. 그는 이 글로 인해 반공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것이 ⌈세대⌋지 필화사건(황용주 필화사건)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1964년 세대지 필화사건을 언론 통제의 일환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보다 세밀히 들여다보면 박정희 정부 초기에 대통령 친위세력 내부에 사회주의 사상 전력자와 반공주의자 들 간에 이념투쟁이 치열했으며, 그런 이념투쟁이 결국 권력투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황용주 필화사건이 발생했다는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황용주 필화사건이 언론 통제가 아니었다는 것은 아니다. 권력투쟁이 이면에 깔려있는 언론통제였다는 것이다. 권력투쟁이 주였으며 언론 통제는 수단에 불과했다. 당시 반공주의자의 선봉에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있었으며 그는 권력의 핵심 박정희의 주변에 포진한 사회주의 전력자들로부터 박정희를 보호하고 미국의 의구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황 용주를 구속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사회주의 전력자를 색출해낸 작업은 한국판 매카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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