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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영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100집
발행연도
2016.9
수록면
171 - 202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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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大傳』의 箕子東來說성립 직후 箕子朝鮮은 서서히 역사적 사실로 수용되었다. 『三國志』단계에서 箕子朝鮮은 濊條와 韓條에 수록되었으며, ‘箕子朝鮮-衛滿朝鮮-漢四郡’의 변천 인식이 처음으로 정립되었다. 『三國志』와 『後漢書』 이래로 중국에서는 箕子朝鮮에 대한 관념이 강화되었고, 魏晉南北朝時代의 ‘朝鮮’은 東夷에 대한 廣義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隋唐시대에는 조선이 고구려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모하였다.
隋代이래로 裴矩와 唐太宗등은 고구려 정벌의 명분으로 郡縣回復論을 제기하였다. 唐代墓誌銘에서도 조선의 존재가 모두 고구려와의 전쟁에 관련된 인물들에게서 확인된다. 결국 ‘高句麗-朝鮮’ 연계인식은 고구려 정벌의 주요 명분이자, 기자조선시대로의 회귀 의식으로 귀결되었다. 그 결과 唐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寶藏王을 朝鮮王으로 封하였다.
고구려에서는 고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인식이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고구려 건국신화나 고분벽화를 단군신화와 연계시켜 보는 견해들이 있긴 하지만, 모두 역사적 사실로 납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고구려에서는 箕子神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이는 고구려가 조선을 자국과 연관시켜 이해하였고 기자신 존재의 필요성을 긍정하였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민 중에서 朝鮮人을 일컫는 사례가 확인된다. 이는 寶藏王이 朝鮮王으로 임명되었고, 중국 내에서 고구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조선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구려 유민들은 중국 내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중국인들의 인식, 즉 ‘고구려-조선’ 연계인식을 수용하여 자신들을 조선으로 일컫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중국의 箕子朝鮮 인식 변천과 투영
Ⅲ. 高句麗의 朝鮮과 箕子에 대한 인식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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