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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상숙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민주주의와 인권 민주주의와 인권 제16권 제2호
발행연도
2016.6
수록면
199 - 239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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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항쟁은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 잘못된 식량정책과 민생정책, 토지개혁 지연, 좌익세력 탄압 등의 객관적 정세를 바탕으로 일어났다. 동시에 이 항쟁은 해방 후 1년 동안 진행된 대중운동의 연장선에서 일어났다.
대구지역에서는 해방 후 1년 동안 ① 노동자의 조직적 파업, ② 학생들의 연합시위, ③ 민주주의민족전선 주도의 대규모 시민 집회와 시위, ③ 도시 빈민들의 식량 요구 시위 등 여러 계층・계급 대중들의 반복된 사회운동 경험이 정치적 행동패턴으로 축적되어 있었다. 대구 진보세력은 10월 항쟁을 통해 이렇게 축적된 경험을 집결된 투쟁 역량으로 보여주었다. 동시에 10월 항쟁은 그들의 한계도 보여주었다. 당시 조선공산당 대구시당위원회가 주도했던 대구 진보세력은 노동자, 학생과 지식인층 조직화에 주력하면서, 인구의 다수를 이루는 도시빈민은 적극적으로 조직하지 못했다. 활동가들의 대중운동 경험도 부족했다.
1946년 9월 총파업에 이어 10월 1일 대구역광장 집회 후 경찰 발포로 철도 노동자 김용태가 사망하자 조선공산당 대구시당위원회는 산하에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학생부와 청년부의 활동가들은 학생-청년 연합 시위를 조직했다. 연합 시위의 목표는 미군과 경찰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경찰 발포 중지를 요구하고 파업 노동자 탄압에 항의하는 수준이었다. 10월 2일 대구경찰서에 들어간 시위대 대표단과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사들로 구성된 대책위도 사태수습 기구 수준에 불과했다. 그들은 광범위한 대중의 항쟁을 조직하고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여 시민권력 쟁취까지 염두에 두었던 항쟁 지휘부는 아니었다. 따라서 10월 2일 오후 경찰서 점거와 시내 곳곳의 도시빈민 봉기는 통제되지 않은 자연 발생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대구의 10월 항쟁 전개과정 재구성
Ⅲ.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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