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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金賢珠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45號
발행연도
2016.6
수록면
67 - 96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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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주거지는 형식분류와 조성시기에 집중되고, 시기적인 변화양상은 간략하게 다루어졌다. 이에 이 글에서는 화성 남양동 유적의 조선시대 주거지를 통해 취사·난방시설을 기준으로 형식분류를 한 후 시기적인 변화양상과 그 요인을 살펴보았다.
Ⅰ기(15세기 중반~16세기)는 아궁이가 설치된 주거지가 일반적으로 나타나며, 부분구들이 일부 조성되기 시작한다. Ⅱ기(17~18세기)는 전면구들이 조성된 주거지가 나타나며, 아궁이가 설치된 주거지보다 많이 나타난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복구과정과 소빙기 현상이 구들의 확대·정착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주거지 내부에 전면구들이 조성되면서 주거지는 구들이 조성된 생활공간과 아궁이가 있는 취사공간으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생활공간이 수혈에서 지상으로 옮겨졌으며, 좌식생활의 정착을 가져왔다.
남양동 유적의 조선시대 주거지에 거주하였던 사람들은 하위계층으로 판단된다. 이는 문헌자료에서 신분에 상관없이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토실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오며, 토실의 형태와 규모가 주거지와 유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주거지는 간단한 형태로 하위계층이 선택하기에 용이한 주거형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거지가 17세기 이후 감소하는 것은 생활공간이 수혈주거에서 지상주거로 변화하는 것이 요인 중의 하나로 보인다. 또한, 17세기 이후 발달한 상업은 사람들을 서울이나 포구로 이동하게 만들었다. 남양지역도 이 시기 읍치가 아닌 포구를 중심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남양동 유적에서 17세기 이후 주거지가 감소하는 양상의 한 요인으로 보인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유적의 개요
Ⅲ. 형식분류 및 편년
Ⅳ. 성격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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