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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서영 (홍익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89號
발행연도
2016.3
수록면
5 - 33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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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과 무령왕비의 합장묘인 무령왕릉에는 목제 두침과 족좌가 부장되었다. 무령왕릉 두침과 족좌의 형태는 중국이나 삼국시대 고분 출토품과 달리 홈이 깊은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두침과 족좌가 부장된 상황, 즉 상장의례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무령왕은 중국 남조 梁과 활발한 대외교류를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무령왕릉의 묘제와 상장의례도 양으로부터 새로운 요소들을 도입하였다. 묘지에 따르면 무령왕과 왕비는 사망 후 바로 왕릉에 매장되지 않고 다른 장소에서 27개월 간 빈장을 행하였다. 빈장은 死者를 일정기간 동안 모셔두고 의례를 행하는 것이다. 백제에서 빈장은 무령왕 이전에도 행해졌지만 27개월로 정해진 것은 중국 유교식 3년상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백제에서는 중국과 달리 27개월간 상복을 입는 服喪과 빈장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는 유교의 3년상의 기간을 따르면서 시신을 온전히 보존하여 묘에 매장하는 것을 중요시 여긴 백제인들의 내세관이 반영된 것이다.
빈장의례를 행할 때 제기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운구의 절차이다. 무령왕릉에는 일본에서만 서식하는 고급 수종인 금송으로 만든 목관이 부장되었다. 반면 6세기 백제와 신라 지역에서는 횡혈식 석실분의 도입과 함께 목관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석제 두침과 족좌를 사용하는 양상을 보였다. 무령왕릉에서 최상의 목관이 있었음에도 두침과 족좌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시신을 누이는 용도가 아닌 상장의례의 절차 가운데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무령왕릉 두침과 족좌의 깊은 홈은 머리와 다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여 빈전으로 운구하는 과정 중 목관 내에서 시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무령왕과 왕비의 두침과 족좌에는 공통적으로 육각문과 연화화생 도상을 장식하였다. 무령왕비 두침에서는 육각문 내에 여러 형태의 연화문과 천인탄생 도상이 나타나고 생명의 근원의 의미를 가진 마카라와 팔메트도 등장한다. 각각의 문양 요소는 다른 시기와 경로를 통해 백제에 전래된 것으로 이와 같은 문양 구성은 백제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무령왕과 왕비가 극락왕생하기를 염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왕비 두침과 족좌의 상단에는 고대 사회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로 인식되어 온 鳥形장식과 樹枝形장식이 부가된 점도 주목된다. 조형장식과 수지형장식은 전통적인 새와 수목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도교적 맥락의 유물들과 같이 벽사와 승선의 의미를 담고 있다. 두침과 족좌가 백제적으로 변용된 유교적 상장례에서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된 것을 상기하면 불교적 측면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적 요소도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무령왕과 왕비의 두침과 족좌는 당시 백제인들의 다양한 사상적 측면을 바탕으로 내세관을 충실히 반영하여 제작한 장례용구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무령왕과 왕비의 喪葬儀禮
Ⅲ. 무령왕릉 두침과 족좌의 형태
Ⅳ. 무령왕릉 두침과 족좌의 장식 문양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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