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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백길남 (한성백제박물관)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86호
발행연도
2017.6
수록면
5 - 47 (43page)
DOI
10.37331/JKAH.2017.06.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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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南朝 史書에만 전해지고 있는 소위 ‘百濟略有遼西’ 記事의 기술배경을 검토하는 가운데, 晉平郡縣 설치를 중심으로 백제와 요서지역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백제약유요서’ 기사의 최대 쟁점은 백제의 군사적 행위와 요서점유 여부이다. ‘백제약유요서’ 기사의 출처와 관련해 백제 表文이 주목된다.
백제는 동진·남조에 자국의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는 표문을 지속적으로 전달했고 중국 官爵의 追認을 요청했다. 표문의 내용은 백제 입장에 편향된 과장과 허위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고, 남조 史家가 백제 표문을 근거로 사서에서 과장되게 서술했을 수도 있다. 표문의 사료 특성과 한계를 고려할 때, 백제의 군사적 행위와 요서점유를 액면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유의가 필요하다. ‘백제약유요서’ 정보가 전해진 이후 남조 사가의 선택적 기술, 축약, 改文 등의 變改를 거쳐 최종적으로 관련 정보가 사서에 기술된 것으로 이해된다.
‘백제약유요서’ 기사의 핵심정보는 백제가 요서와 관련해 군현을 설치하고 관할했다는 것이다. 특히 晉朝를 관칭한 군현명이 주목된다. 西晉시기 진조를 관칭한 군현명은 통일제국인 진조의 위용을 반영한 상징성이 있었다. 그러나 화북지역을 상실하고 南遷한 東晉시기의 진조를 관칭한 군현명은 진조 회복과 漢人 유이민 安置라는 수세적인 명분으로 주로 명명되었다. ‘백제약유요서’의 사건 시점은 1차 ‘高驪略有遼東’ 시기인 385년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고, 당시 요서지역에는 여러 지역 출신의 한인 유이민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다.
백제는 4세기 말 혼란기 속에서 동요하고 있었던 요서지역 한인 유이민 집단을 대상으로 樂浪太守와 진조를 관칭한 군현명을 표방하여 이들의 華夷觀念을 불식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는 군현 단위로 결집된 한인 유이민 집단의 존재양태를 존중하여 요서군과 진평군현 같은 중국식 군현 단위를 설치하고 이들을 안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써 백제는 중국 내지 한인 유이민 집단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백제는 동진·남조와 활발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동진·남조는 백제의 漢人係 使臣과 표문을 통해 백제로 내투한 한인 유이민 집단의 유입경위(‘백제약유요서’)와 존재양태(중국 지명 태수호)에 대한 이해를 축적했을 것이다. 백제는 ‘백제약유요서’ 정보를 동진에 전달하여 진조를 지지하는 藩國의 입장을 취하면서 국왕 책봉호 승급 등의 외교적 실익을 추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

국문 초록
I. 머리말
II. ‘백제약유요서’ 기사의 분석
III. 漢人 유이민 집단의 요서 유입과 진평군현 설치
I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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