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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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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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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인천학연구 인천학연구 제13권
발행연도
2010.8
수록면
89 - 131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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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인천(원 인천)의 읍호와 읍격의 변천 과정을 정리해 본 것이다. 원래 인천은 비류국 또는 미추국이었으나, 기원 전후 무렵에 백제의 영역이 되었고, 백제에서는 이를 彌鄒城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 왕에 의해 4세기 말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었고, 고구려에서도 이를 미 추성이라 했는데, 지방조직에서의 위상은 縣級 정도의 성이었다. 그러다 가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신라에 통합되었 고, 新州 관할 하의 한 성이 되었다. 이때 역시 인천의 위상은 縣級 정도 였고, 지방관으로는 현급의 장관인 道使가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었을 것으 로 짐작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의 지방제도가 더욱 체계화되면서 인천은 栗木郡의 領縣이 된다. 그리고 757년(경덕왕 16) 경덕왕이 한화정책의 일 환으로 지명 개정을 추진할 때는 邵城縣이 되었다. 그러나 경덕왕의 개 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소성현은 다시 매소홀현이나 미추홀현으로 환원되 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대 인천은 1018년(현종 9) 樹州의 임내가 되어, 고려의 지방제도 속에 처음으로 일정한 위치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임내이기 때문에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은 파견되지 않았고, 통솔은 향리층에 의해 이루어졌 다. 그러나 숙종 때는 경원군으로 승격되는데, 그것은 숙종의 思母의 정 과 인주 이씨 세력의 무마가 목적이었다. 이때부터 인천에는 지방관이 파견되는 등, 인천의 위상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나아가 인종 초년에는 다시 仁州로 승격되는데, 그것은 인종의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함께 李資 謙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경원군에서 인주로의 변화 는 인천의 영역의 확장과 주변 군현과의 영속관계 확대 등, 인천의 위상 을 강화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1390년 경원부로 승격되었는데, 그것은 공양왕이 신종을 매개로 왕권의 정통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인천의 읍격 변화가 일어난다. 시작은 태조가 경원부를 인주로 다시 환원하는 조치였는데, 그것은 고려의 정통성을 부인하기 위 한 것이었다. 그리고 1413년에는 인천군으로 개명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인천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이어서 1459년에는 인천은 도호부로 승격하 는데, 그것은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외향이기 때문이었다. 이로서 인천 의 읍격과 위상은 일단 안정되었으나, 광해군 때·숙종 때·순조 때 도합 3차례 현으로 강등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인천의 읍호와 읍격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인천 자체는 해체되거나 분해되지 않고, 하나의 고을로 수천 년을 유지해 왔 다. 이 점이 바로 인천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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