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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재곤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제49호
발행연도
2015.9
수록면
367 - 410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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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은 ‘애국주의’ 인식이 가장 팽만한 제국주의 시기, 일본 국내의 ‘거국일치’ 동원의 최종 결론이었다. 그런데 당시 한반도는 일본의 전쟁동원 체계밖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 상황에서 조약 및 급조된 군율(軍律)을 근거로 한 집단적 · 조직적 동원과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이 글은 러일전쟁의 전투상황보다는 그 기간 일본군의 만주진출을 위한 한국 내의 거점 확보와 병참기지 역할을 해야만 하였던 평안도의 사회생활과 지역경제에 대한 제약이 어떻게 전개되었고, 그것이 미치는 의미와 영향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 지역은 러일전쟁 시기 육상전의 핵심 동선이었다. 이 기간 평안도 지역은 10년 전 청일전쟁 시기의 경험을 통한 이중의 충격이 지속되었다. 평안도에서의 러시아와 일본 간 전투는 1904년 5월 압록강 전투를 기점으로 실제적으로 종식되었다. 그런데 이후 러일전쟁 종전까지 지역의 모든 일상사는 일본의 의지에 전적으로 규정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일본군의 중국 대륙침략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일본은 인력과 물자의 강제동원을 지속시키면서 본국의 병참인원을 대체하는 효과를 보고자 하였다.
당시 각종 보고서에도 표현되어 있듯이 이 지역 피난상황은 마을이 완전히 텅 비어 버린 총체적 Exodus였다. 남아 있던 일부 주민들의 참혹한 생활상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어렵게 동원한 일부 전쟁 동원 인부들의 소규모 절도 행위나 그에 대한 동료와 주민들의 묵인도 전시 ‘군율’과 ‘불고지죄(不告之罪)’를 적용한 참형(斬刑)과 총살, 태형(笞刑) 등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물가폭등과 군용수표의 광범위한 유통으로 지역민의 생활고는 유래없이 피폐하었고 화폐 주권도 전국 어느 곳보다도 제약되었다. 거기에 더해 평양과 진남포의 식민지형 도시 인프라 구축과 일본인 이민을 염두에 둔 ‘대동강 프로젝트’를 통한 지역 질서 재편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농민은 경작지를, 도시 주민은 주거공간을, 어민은 어업권과 어장까지도 일본 어민에게 빼앗기고 어업노동자로 전락하였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러시아군에 의한 인적·물적 피해상황
Ⅲ. 일본군에 의한 인적·물적 피해상황
Ⅳ. 군용수표 유통과 통화시스템의 왜곡
Ⅴ. 지역경제와 ‘대동강 프로젝트’
Ⅵ.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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