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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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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황태연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구 정신문화연구) 정신문화연구 2014 여름호 제37권 제2호 (통권 135호)
발행연도
2014.6
수록면
213 - 274 (6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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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의 명청대 내각제가 1679년 윌리엄 템플에 의해 영국의 내각제로 도입되는 과정을 다룬다. 필자는 이 논제를 여러 개의 논문으로 나누어 다루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중국의 내각제와 이 내각제를 뒷받침해준 공자의 정치철학을 다룬다.
공자는 순우의 ‘무위이치(無爲而治)’와 ‘유이불여(有而不與)’의 통치철학에 따라 ‘군주’와 ‘현신’의 ‘분권적 군신공치’에 기초한 제한군주정을 이념으로 삼았다. 이 분권적 군신공치 이념은 구체적으로 왕권민수론에 기초한 백성의 방본적 주권, 임금의 영유권, 현신의 통치권 간의 권력분립을 지향한다. 이 통치철학은 임금과 백성 간의 공감대에 기초한 덕치의 이념을 전제하는 것이다.
명·청의 내각제는 공자가 꿈꾸었던 이 ‘분권적 군신공치’에 기초한 제한군주정을 이념으로 삼았고, 이를 어느 정도 가능하게 했다. 여기서 ‘군주’는 하늘 같은 백성으로부터 왕위를 받은 임금이고, ‘현신’은 천하의 백성이 다 알아주는 현자로 이해되었다. 이 분권적 군신공치체제는 중국역사에서 내각제에 기초한 분권적 제한군주정으로 구현되었다. 중국의 군주정은 민본주의, 예치·덕치주의, 공의(언관·상소)제도 등 여러 정치이념과 견제장치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제약되어 있었을 뿐더러, 명나라 때부터는 재상(승상)을 대체한 ‘내각’의 권력분립적 의정권에 의해 황권이 크게 제한된 제한군주정으로 변모했다.
명·태조 홍무제 때 승상제가 폐지된 뒤 황제의 자문비서기구로 등장한 내각은 제3대 성조 영락연간에 문연각대학사들의 정식 ‘기무참예제’로 제도화되어 제4·5대 홍희·선덕연간(1424?1435)에 속료(屬僚)를 가진 독립기구로 확립되었고, 내각대학사들 중 태자의 사부들이 ‘삼호관’으로 우대받고 선덕연간에는 내각에 표의·의정권이 부여됨으로써 내각에 의해 황권의 자의를 견제할 수 있는 ‘보정(輔政)체제’가 수립되었다. 이 내각제적 보정체제는 제6대 영종 정통연간(1435?1449)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복벽한 영종 천순연간(1457?1464)에는 표의권이 내각에 전속되고, ‘내각수보’ 또는 ‘수상’이 나타나 그 지위가 황제권을 견제할 수준으로 강화되면서, 내각제는 대등한 각신들의 보정체제에서 위계적 ‘수보체제’로 발전했다. 환관에 의존한 제8대 헌종의 성화연간(1464?1487)에는 내각제가 일시 무력화되었으나, 제11대 세종 가정연간(1521?1567)에는 수보내각제가 더 강력한 집체적 분권공치체제로 부활하여 명대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러나 명말에 내각제가 암주의 난정과 환관의 권력찬탈로 파괴되면서 망국을 맞았다. 청나라는 내각제도를 더욱 발전시켜 계승했다. 청조는 환관의 정치개입 기회를 원천배제하고 친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내각제의 권력지위를 군기처의 설치로 조금 조정했을 뿐이다.
다음은 공자의 정치철학과 중국의 내각제가 어떤 경로로 유럽에 알려지고 윌리엄 템플과 찰스 2세가 영국으로 받아들여 유럽의 근대적 내각제가 발전되는지에 관해 논할 것이다. 이 논의가 발표될 기회가 곧 오기를 기대한다.

목차

Ⅰ. 서
Ⅱ. 공자의 공감적 ‘무위지치’와 분권적 군신공치론
Ⅲ. 중국의 역대 내각제
Ⅳ. 결론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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