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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상숙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비판사회학회 경제와사회 경제와사회 통권 제101호
발행연도
2014.3
수록면
117 - 150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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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정부 수립기 경북 영천에서 있었던 빨치산과 군경 간의 지역 내전과 이중권력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시기 마을 주민과 빨치산 상층부 사이를 매개하는 위치에 있었던 마을 청년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경험했는지 살펴보았다. 1946년 10월 항쟁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지역인 경북 영천에서는 항쟁 직후부터 야산대가 조직되었다. 야산대는 1948년 ‘2·7 구국투쟁’ 직후 경북 최초의 빨치산으로 조직되었고, 1948년 말 대구 6연대 사건 직후 더욱 강화되었다. 군 외곽 산간지대 전역에서 활동하던 영천유격대는 1949년 ‘9월 공세’ 시기에 지서 습격과 열차 탈취 등을 했다. 정부는 경찰, 군인,서북청년단, 호림부대, 현지 우익 청년단체를 동원하여 빨치산을 토벌했고 1949년 여름~겨울에 합동토벌작전을 계속 벌였다. 외곽의 산간지대에는 군경과 빨치산의 이중권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남로당의 활동이 활발했던 마을에는 지방 좌익 상층부와 마을 주민 사이를 매개하는 중간층이 두텁게 형성되었다. 주로 10대~20대 청년층이었던 그들은 지방 좌익이나 빨치산 상층부보다는 연령대가 낮고 계급적으로도 하층민이 많았고, 우익 청년단체나 민보단에도 동원되어 좌·우익 양쪽 집단의 토대를 중복으로 형성하기도 했다. 그들은 양쪽에 동원되는 모순된 위치에서 강제성과 자발성이 혼합된 채 순응과 저항,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며 생존을 모색했다. 내전과 이중권력 상황에서 입산자의 하부 구성원과 마을 주민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유동적인 것은 민간인 집단학살이 대규모로 발생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정부 수립기에 영천에서 학살된 민간인은 최소 600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1950년 초 당국의 권유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뒤 이 중 최소 600여 명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학살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중앙 국가기구는 지방권력과 마을 주민들을 선별적으로 배제하여 신생 국가의 통치주도권을 획득하고 체제를 공고히 해나갔다.

목차

1. 머리말
2. 영천의 1946년 10월 항쟁과 이중권력 형성
3. 빨치산과 마을 청년들의 일상생활
4. 빨치산과 지방 좌익 활동가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
5.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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