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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구 정신문화연구) 정신문화연구 2008 가을호 제31권 제3호 (통권 112호)
발행연도
2008.9
수록면
5 - 40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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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을 공식 채택하여 부르주아와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려했다. 그러나 1946년 후반기 이후 남의 공산주의자들은 박헌영이 신전술을 채택하는 것을 계기로 부르주아와의 연립을 포기했으며, 미국(과 그와 결탁한 자본가)에 대항하면서 대중정당인 남조선로동당을 결성하는 합법ㆍ비합법의 ‘배합투쟁’에 나섰다. 이에 비하여 북의 김일성은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결성으로 인해 조직적으로는 남으로부터 독립하였지만, 이론적으로는 여전히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을 1946년 9월 개진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다수 민족자본가와 지주들은 이미 1946년 상반기 토지개혁 추진과정에서 스스로 북을 떠나 연립에 참여할 수 없었고, 동질적 계급적 기반 위에서 소련의 후원을 받아 편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반면 남의 남로당은 조직을 미국에 노출시켜 1948년 4ㆍ3사건과 10월 여순사건, 유격대 활동 등으로 인해 단계적으로 무장해제당하는 고난의 행군을 자초했다. 남로당이 남조선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무장봉기 혁명론에 대해 친김일성파인 강건ㆍ최용건과 연안파 등은 미군정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혁명역량을 낭비하지 말고 북의 혁명기지가 주동이 되고 남조선 혁명 역량이 배합되는 남북 배합작전에 의해 이룩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 후 남의 공산주의자들은 북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압도당했다. 1948년 8월 3일 슈티코프는 김일성을 만나 남북 노동당 연합 중앙위원회 구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박헌영을 위원장으로 할 것을 권고했으나 1949년 6월 남북로 동당이 합당했을 때는 김일성이 위원장에 박헌영과 허가이가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박헌영 등 남로당 지도부는 종파주의자로 낙인찍혀 6ㆍ25전쟁의 와중에서 제거당하는 운명을 감내해야 했다. 결국 헤게모니를 틀어 쥔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해방 직후 시기를 반제ㆍ반봉건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시기로 포장하여 박헌영 계열이 주장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의 흔적을 1950년대 중반 이후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목차

Ⅰ. 서론
Ⅱ. 해방 직후 남한 좌익의 혁명론: 8ㆍ15 직후 남한에서 전개된 “현단계논쟁”의 구조
Ⅲ. 8ㆍ15 직후 북한의 단계규정
Ⅳ. 1946년 남한 조선공산당의 노선변화: 부르주아와의 연립 포기와 신전술,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의 포기와 인민민주주의에의 지향
Ⅴ. 맺음말: 혁명의 동력과 대상, 북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 흔적 제거
참고문헌
국문요약
English Abstr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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