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영수 (단국대학교) 최인학 (인하대학교)
저널정보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아시아문화연구 아시아문화연구 제30집
발행연도
2013.6
수록면
219 - 254 (36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고는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신문잡지에 수록된 ‘택일, 궁합, 피로연, 신혼여행’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혼례문화의 지속과 변용 양상을 살펴보았다.
택일을 하는 데 있어 젊은 세대의 경우, 길일보다는 사회생활에 불편을 주지않는 요일과 자기에게 기념이 될 만한 날짜를 선택한다. 당시 신문잡지에서는 택일과 궁합을 미신적인 행동으로 여기고 이를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혼인당사자의 행불행을 좌우한다는 믿음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도 전통적인 혼인관행에 따라 택일을 하고 궁합을 보았다.
전통 혼례에서의 혼인잔치는 일본에서 유입된 피로연으로 대체된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피로연을 혼인잔치의 별칭으로 이해하고, 초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객으로 참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런 행동은 신랑신부와 양가 부모에게 경제적 부담과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음식을 과도하게 차리는 피로연을 허례허식으로 규정하고 이의 개선과 폐지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피로연의 행태는 시간이 경과해도 변하지 않았다.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피로연을 검소하게 치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혼여행은 일본을 경유해서 받아들인 것으로 전통 혼례에는 없는 절차이다. 당시 신혼여행은 고된 시집살이에서 여성이 정신적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되어 그 필요성이 제기된다. 하지만 실제 신혼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20년대까지는 필요에 의해 일부 사람들이 신혼여행을 떠났으며, 1930년대는 이전보다 활성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신혼여행을 다녀온다.

목차

Ⅰ. 서론
Ⅱ. 일제강점기 혼례문화의 변모양상
Ⅲ. 결론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4)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4-900-003181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