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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영수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아시아문화연구 아시아문화연구 제28집
발행연도
2012.12
수록면
151 - 18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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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혼인유형과 혼례식을 중심으로 우리의 혼례문화가 어떻게 변모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19세기 후반 개항과 함께 수용된 기독교와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일생의례의 하나인 혼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통 혼례 중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이는 것이 바로 혼인유형이다. 혼인은 부모가 주가 되느냐 자식이 주가 되느냐에 따라 중매혼인과 연애혼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유연애사상이 전파되자 부모에 의해 강제적으로 거행되던 혼인에 반기를 들고 사랑을 기반으로 한 연애혼인을 주창한다. 1910년대 중반까지는 전통적인 혼인 관행인 중매에 새로운 형태의 연애가 접목하는 시기였다면, 1910년대 중후반부터 1920년대까지는 연애의 비중이 높아지는 시기이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이르면 혼인 유형이 연애와 중매를 절충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이 시기엔 유교식 혼례를 구식이라고 하여 기피하고 예배당에서 기독교식으로 올리는 신식혼례를 선호한다. 그런데 비신자가 예배당에서 혼례를 올리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하여 새로운 형태의 혼례식을 모색하게 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계명구락부식으로, 이 양식은 사회식 혼인을 대표한다. 1930년대에 명망 있는 사람이 주례자로 선정됨으로써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혼례식에서 주례의 비중이 높아지게 된다.
혼례식 장소는 동아?조선일보 강당, 공회당, 요릿집, 부민관, 예식부 등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 예식부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혼례식 전문공간인 예식장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예식부에서 혼례식을 거행한 것은 1930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렇게 볼 때,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반포한 ‘의례준칙’으로 인해 도시형 혼례가 본격화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제정한 ‘의례준칙’의 혼례는 당시 우리 사회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목차

Ⅰ. 서론
Ⅱ. 혼인유형―중매와 연애
Ⅲ. 혼례식의 변모양상
Ⅳ. 결론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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